전기차 시대의 시작을 알린 미국 테슬라의 인기는 젊은 층에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기자의 한 지인은 자신의 장인이 몇달을 기다린 끝에 테슬라 구매에 성공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차량 수리, 서비스 등을 고려해 현대차의 아이오닉5나 기아의 EV6 등을 권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제 70대 후반, 인생의 마지막 차로 꼭 테슬라를 사야겠다는 장인의 뜻이 확고했다.
혜성같이 나타나 스마트폰 시장을 열고 세계 휴대폰 시장을 제패한 애플의 아이폰처럼 전기차 시장에 아성을 쌓아가고 있는 테슬라의 위력을 보여주는 단면들이다. 소비자들을 열광시키는 좋은 제품 하나면 언제든 글로벌 최강 기업으로 부상할 수 있는 세상이다. 제품만 좋다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지갑을 여는 소비자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우리 기업들도 분전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는 지난 10월 미국에서 5300대가 판매돼 역대 월간 최다 판매 기록을 세웠다. 제네시스를 포함한 현대차·기아 브랜드 전체 기준으로는 올해 처음 미국 시장에서 일본 혼다를 제치고 5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10월까지 누적 기준으로 현대차·기아는 128만9608대를 판매해 혼다(127만6507대)를 1만3000대가량 앞섰다. 유럽에선 아이오닉5와 EV6가 '2022년 유럽 올해의 차' 최종 후보 7개 차종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전자 제품 시장에선 삼성전자가 지난해까지 15년 연속 글로벌 TV 판매 1위를 차지했고, LG전자는 생활가전 부문에서 미국 월풀을 제치고 올해 처음 세계 1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을 놓고 국적 없는 혈투를 벌이는 사이 각국 정부와 의회는 자국 산업을 키우고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또다른 경쟁을 펼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첨단 산업의 핵심 인프라가 되는 반도체 산업이다.
미국은 반도체산업에 520억달러(약 62조원)를 지원하는 법안을 발의, 상원을 통과했다. 삼성전자가 최근 발표한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20조원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2공장 신설에 지방정부 등에서 받는 세제혜택도 10억달러(약 1조20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일본도 무너진 반도체 인프라를 재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반도체 산업 지원에 약 6000억엔(약 6조원)을 배정할 예정이다. 이 중 4000억엔(약 4조원)은 대만 TSMC가 소니와 합작해 일본 구마모토현에 세우는 신규 공장 건설에 지원하고 나머지 2000억엔(약 2조원)은 미국 마이크론과 일본 키옥시아의 공장 증설에 투입할 것이라고 한다. EU(유럽연합)도 국가 보조금 규정을 완화해 회원국 정부가 반도체 사업분야에 자금지원이 가능토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우리 정부도 국내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지난 5월 'K-반도체 전략'을 발표했지만 삼성전자 등 대기업의 반도체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은 최대 6% 수준에 그쳐 경쟁국에 비해 지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난항 중이던 반도체지원특별법과 부대법안에 대한 국회 논의가 진전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대기업 특혜' 등 논란이 언제 다시 불거질지 모른다.
국적 불문 좋은 제품만이 살아남는 글로벌 시장 경쟁과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각국 정부의 국가대항전이 얽히고설키면서 무한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기업의 힘만으론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정부와 국회가 함께 뛰어야 한다. 미국 일본 유럽 등 모두가 그렇게 하는데 우리만 못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우리 기업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우게 내버려둬선 안된다.
[저작권자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