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기업의 생존이 달렸다. 특정 개인의 주장이 아니다. 이미 글로벌 스탠다드다. 블랙록을 비롯해 글로벌 큰손들은 일찌감치 ESG를 신천하지 않는 기업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있다. 지난 여름 세계적 정유회사 엑손모빌의 이사진이 교체된 것이 단적인 예다. '탄소중립 자산운용사 이니셔티브'(Net Zero Asset Manager Initiative)에 참여한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이 칼을 뽑아든 것이다.
국내 연기금은 물론 자산운용사들도 ESG에 주목한다. 곧 국내에서도 ESG 경영을 실천하지 않는 기업에 돈줄을 끊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1차 타깃은 석탄채굴·발전산업 관련 기업이다. 빠르면 내년부터 투자제한 대상의 범위와 기준 등이 생긴다. 여기에 정부도 가세한다. 산업통상자원부, 환경부 등은 녹색분류체계(택소노미)를 마련 중이다. 택소노미는 특정 산업 영역이나 기업 활동이 녹색산업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기준이다. 석탄산업뿐 아니라 LNG(액화천연가스) 발전산업도 택소노미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높다. 곧 국내에서도 ESG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전 세계가 ESG에 잠식당하고 있다. 국내기업들도 힘겹게 적응 중이다. 민간기업은 강력한 오너(최대주주)의 의지가 변화를 만들고 있다. 문제는 공공부문이다. 공공기관 CEO(최고경영자)들 역시 민간기업의 오너 못지 않게 ESG에 대한 의지가 가득하다. 그런데 왜 변화가 더딜까.
한국전력공사, 한국가스공사 등 국내 에너지 공기업들은 글로벌 ESG 규범의 타깃이다. 이들은 최근 앞다퉈 CEO 산하에 ESG 전담조직을 꾸렸다. 그러나 이들 공공기관의 ESG 경영은 속빈 강정이다. 당장 글로벌 투자자들 앞에서 진행하는 ESG IR(기업설명회)에 내놓을 내용조차 제대로 없다는 게 ESG 실무자라는 사람들의 얘기다. 선언적인 문구를 빼면 남는게 없다. 이유를 물어보면 이래저래 핑계만 댄다. 그들에게 ESG는 임기 3년짜리 지나가는 CEO가 던진 귀찮은 일거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올해 일제히 CEO가 교체된 한전의 발전자회사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정부가 최근 상향한 2030 NDC(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에 따르면 2030년까지 발전 부문은 총 1억1970만톤의 온실가스를 감축해야 한다. 2018년 발전 부문 배출량의 44.4%나 되는 수치인데, 앞으로 8년 만에 절반 가까이 줄여야 하는 셈이다. LNG도 줄여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화석연료 발전을 줄이는 대신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부 발전자회사의 경우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대한 투자 의지가 원전기업인 한국수력원자력만도 못하다. 하물며 한수원은 발전과정에서 온실가스 배출이 거의 없는 회사다. 그나마 외부 출신 CEO가 이끄는 한국동서발전, 한국남부발전 정도가 신재생에너지 전환에 속도감을 내는 정도다.이마저도 CEO의 3년 임기가 지나면 어찌될지 모른다는 게 현실이다. '철밥통' 조직문화는 ESG 시대를 맞는 공공기관의 최대 위험요소다. 탄소중립의 미래에 이런 공공기업은 설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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