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가 이어 찾는 명품양복"…73년 '국정사' 양복명장의 꿈

머니투데이 부산=오세중 기자 | 2021.09.23 04:31
부산 첫 양복점 '국정사' 대표인 양창선 명장./사진=국정사 제공

"3대에 걸쳐 우리집에서 옷을 맞춘 한 손님이 '손주가 결혼할 때도 여기서 옷을 만들고 싶다'고 하대요. 3대째 이어지는 경우는 있었지만 4대까지 이어지는 고객은 없었습니다. 그 손주분까지 우리집 고객이 되면 4대째가 되는 겁니다. 그 예복은 꼭 제가 직접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100년 전통을 만들겠다'는 부산 첫 양복점 '국정사'의 대표인 양창선(72세) 명장은 이달 16일 머니투데이와 만나 "10년만 더 건강하게 경영하면 가능할 것 같다"고 환하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도 새로 마련한 작업장에서 제자들 작업을 봐주다 왔다는 양 명장의 얼굴에는 세월을 견뎌온 명장으로서의 단단함과 멀끔하게 차려 입은 수트에서 멋스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양 명장은 원래 제주도 출신이다. 1966년 18세가 되던 해, '제대로 된 기술이 있으면 대접 받는다'는 선친의 뜻을 새기고 혈혈단신 부산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처음 바늘을 손에 쥐었다. 재단사로서 기능이 절정에 이를 무렵 국정사의 전신인 태양피복사 설립자인 김필곤 선생을 만났다. 그는 조선인 최초의 재단사로, 부산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이름 난 인사였다.

양 명장의 성실함과 실력을 눈여겨 본 김 선생은 이후 1981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 명장에게 가게를 넘겨준다. '나라가 바로 서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국정사'로 이름을 바꾸고 100년 가게로 만들겠다는 의지로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켜왔다. 김 선생이 태양피복사를 1948년에 설립했으니 국정사는 73년째 맞춤양복 외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국정사 100년을 위한 '시동'


국정사 대표 양창선 명장(오른쪽)과 가업을 잇고 있는 아들 양필선씨(왼쪽)./사진=국정사 제공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기성복이 빠르게 시장을 점령하면서 맞춤 양복은 커다란 난관에 봉착했다. 국정사도 수차례 가게를 이전할 수밖에 없었지만, 끈질기게 버텨왔다. 소수지만 '최고', '명품'을 추구하는 고객들이 잊지 않고 찾아줬기 때문이다. 양 명장은 "요즘 맞춤 정장을 덜 찾는 건 사실이지만 기성복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며 "하나하나 치수를 재어 만들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 최적화된 편안함과 품격,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덕분에 기성복이 보편화 일상화 됐음에도 국정사의 고객들은 세대를 이어 찾는다고 한다. 양 명장은 "맞춤 양복의 우수성을 인식하면 아들, 손주까지 고객으로 이어진다"며 "국정사도 가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고객들도 대를 물려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양 명장의 아들 양필선씨(40)도 아버지 밑에서 양복배달부터 시작해 양복 짓는 일을 배웠다. 이후 본격적으로 삼성디자인 학교에서 시각디자인과 패션디자인을 한 후 2005년에는 한국맞춤양복협회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타는 등 가업을 잇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다.


양 명장의 '국정사'는 지난해 12월 중소벤처기업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뽑는 '백년소공인'으로 선정됐다. 백년소공인은 빠르게 변화하는 제조환경 속에서 장인 정신을 가지고 15년 이상 이어오는 소공인 중 숙련된 기술과 성장 역량을 갖춰야 한다. 오랜 기간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경영을 하는 우수 소상공인의 성공모델이라는 평가를 받은 셈이다.

최근엔 '맞춤형 양복은 결국 고급 양복'이라는 사업적 한계를 위한 돌파구 마련에도 나서고 있다. 양 명장은 "대를 잇는 단골들 뿐 아니라 젊은 세대를 위한 길을 열려고 한다"며 "결혼 웨딩 촬영복, 턱시도 대여서비스 등 온라인을 통한 대여서비스를 아들이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대가 바뀌어도 좋은 옷을 알아보는 사람은 결국 맞춤 정장을 찾게 된다"며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손주로 이어지는 옷의 품격을 계속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극약 먹을 각오로 임한 장애인 제자의 금메달


국정사 한 쪽 벽면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으로부터 받은 훈장과 표창장이 걸려 있다. /사진=오세중 기자


양 명장은 산학협동 맞춤형 교육 차원에서 패션 전공 대학생들의 맞춤양복 기술경진대회 준비를 지원하는 등 후진 양성을 위해서도 다양한 지원을 해 왔다. 교도소에서 재봉 교육을 받은 한 수감자는 2001년 전국기능경기대회 은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장애인으로서 힘들게 교육을 받던 제자가 2011년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에서 금매달 수상자로 지명되는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라고 말했다. 양 명장은 "당시 모니터 앞에서 발표를 기다리다 수상 확정이 뜨는 순간 와아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환호하는 제자의 손에서 뭐가 툭 떨어지는 걸 봤다"며 "그건 극약이었는데 제자는 '생계가 막막해 메달을 따지 못하면 죽으려고 했다'고 하더라"고 당시를 소회했다.

이어 "지금도 기능올림픽을 준비하는 제자가 있는데 계속 힘 닿는데까지 장인을 키워내는데 일조를 할 것"이라면서도 "유명 스포츠는 후원도 받고 하지만 기능올림픽은 그런 게 없다보니 힘든 생계를 견디며 준비해 나가는 것이 참 쉽지 않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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