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팩트풀니스 [광화문]

머니투데이 양영권 사회부장 | 2021.08.10 03:50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생 중 딱 두명이 취직을 했다. 한 사람은 극장 영사기사, 한 사람은 수학교사였다. 나머지는 모두 백수였다. 취직한 두 사람이 동기들을 불러놓고 누가 술값을 낼 것이냐 논쟁을 벌였다."

다행히 요즘의 얘기가 아니고 1960년대 상황이다. 고(故) 이종욱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때의 얘기인데, '이종욱 평전'을 읽다 이 일화가 눈에 들어왔다. 금성사에서 라디오를 개발해 생산한 게 1959년이고 삼성전자는 69년에야 생겼으니 척박한 당시 전자산업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대부분의 산업이 태동기였던 터라 다른 학과라고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반세기도 더 된 시절 얘기를 꺼낸 것은 최근 견습기자 채용에 작문 시험 답안을 채점한 경험 때문이다. 여러 제시어가 가운데 응시자들은 대부분 '아파트'를 선택해 작문을 했다. 얘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다양했지만 아파트라는 키워드를 통해 'MZ세대'가 기성세대에 갖는 반감을 드러낸 것은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아파트를 장만하는 건 인생 최고의 목표다. '기성세대가 공고한 기득권을 구축한 탓에 아파트 가격은 넘볼 수 없을 정도가 됐다. 따라서 지금은 성공을 위한 사다리가 치워진 세상이다.' 마치 삼단논법을 통해 우리 사회가 '헬조선'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 같았다. '헬조선'을 얘기하기 위해 아파트라는 소재가 호명된 것이다.

기성세대는 사다리를 걷어찼는가. MZ세대는 그들에 비해 불리한가. '헬조선'을 얘기할 때 흔히 거론하는 취업난을 한번 보자. 산업 고도화의 속도만큼은 아니지만 청년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대졸이상 일자리는 계속 늘었다.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별근로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를 시작한 1993년 대졸이상 학력 근로자 수는 87만3720 명이다. 2020년엔 493만8501 명으로 6배에 가까워졌다. 감소한 해는 1994년과 98년 뿐이다. 물론 서울대를 나와도 태반이 백수였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일자리가 많아졌다.

일자리는 늘어나는데 취업난의 고통은 왜 갈수록 심해지는가. 이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그만큼 더 공정해졌다는 걸 방증한다. 사실 '취업난 악화'라는 표현은 '상위권대 남성졸업생'의 관점이다.

졸업도 전에 대기업 서너 곳 합격을 했다는 과거 얘기는 서울 주요 대학과 지방 국립대 졸업생들에게만 해당했다. 그런 대학의 과사무실에는 공채 시즌이면 입사 원서가 쌓였지만, 그 밖의 대학 졸업생들은 원서조차 구할 수 없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출신대학과 상관없이 입사 지원이 가능하고 블라인드 채용도 확산한다. 여성은 채용과 임금, 승진 등에서 불이익을 당했지만 해소되는 추세다.


입결(입시결과) 상위 대학 남자 졸업생들에게만 열려 있던 취업 기회가 그밖의 대학 졸업생과 여성에게까지 확대되면서 생겨난 현상인데, 이게 '취업난 심화'로 받아들여진 것이다.직관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달리 상황은 개선되고 있다.

기성세대의 경쟁을 과소평가해서도 안된다. 기성세대는 작은 노력으로만 산업화 시대의 열매를 취했는가. 입만 벌리고 있어도 열매가 저절로 떨어지는 시대였다면, 그 산업화세대의 자식들인 MZ세대는 모두 금수저여야 한다.

헬조선의 상징이 된 아파트 얘기를 하자면, 상품가격이란 오르기만 하는 게 아니다. 시장원리에 맡긴다면 장기적으로 균형가격에 수렴한다.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은 분명 문제지만, 누구나 서울에 아파트 한 채 씩 장만해 사회생활과 결혼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사회도 분명 정상은 아닐 것이다.

항상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려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 의도에 이용당할뿐더러 진짜 가치 있는 목표를 세우고 실행하는 것도 힘들어진다.

한국인 최초로 국제기구 수장이 된 이종욱 WHO 사무총장이 61세를 일기로 2006년 숨졌을 때, 재산이라곤 낡은 볼보 승용차 한 대가 전부였다. 살던 아파트는 월세였다. 서울대 의대를 나온 이종욱이 아파트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면, 그의 리더십으로 가능했던 글로벌 규모의 성취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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