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포괄주의'보다 '보신주의'

머니투데이 박재범 증권부장 | 2021.05.25 04:25
# '포괄주의·네거티브 시스템'.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규정, 사항만 나열하고 나머지는 원칙적으로 자유화하는 체제다.

정부가 규제 완화를 말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포괄주의'다. 자랑스럽게 선언한 횟수만 수천, 수만번이 넘는다. 현실은 반대다. 선언은 선언일 뿐이다.

포괄주의를 전제로 만들어 진 법령이라도 유권해석을 요청하면 "법에 허용돼 있지 않다"는 열거주의의 벽에 부닥친다.

허가제를 등록제로, 등록제를 신고제로 전환한다는 규제 완화 정책도 거의(실제론 전부) '구라'다. 등록·신고만 하면 된다는 발표를 믿고 서류를 낸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와 '끈기'다.

사실 우리나라 금융 규제의 근본은 열거주의다. 모든 금융업을 금지하고 면허를 통해 허용하는 금융업만 영위할 수 있다. 그래서 금융은 대표적 '규제 산업'으로 불린다.

그렇다보니 약점이 생겼다.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시장의 빠른 변화를 쫓지 못했다. 뒷북만 친다는 반성이 컸다. 법과 시행령까지 만들다보면 시장은 멀리 가 있다.

기능별 규제를 전제로, '포괄주의'를 도입한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이 탄생한 이유다. 금융상품에 원금손실 가능성만 있으면 무조건 금융투자상품으로 보고 자본시장법으로 규율한다.

'산업 육성과 투자자 보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포석이다. 하지만 자본시장법이 만들어진 2007년 이후 포괄주의가 적용된 사례는 전무하다.

#2015~2016년 부동산 시장을 흔든 '상품' 하나가 등장했다. 저금리 시대에 "연 10% 이상 고수익" 등의 간판을 단 수익형 부동산이다.

수익형 부동산은 호텔, 콘도 등을 아파트처럼 투자자가 시행사로부터 객실별 소유권을 분양받고 호텔 위탁운영사와 위탁운영계약(임대차 계약)을 맺어 수익을 배분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관광 시장 침체 등 여건 변화로 수익은커녕 원금 손실이 불가피해졌다. 정부는 '유사수신행위' '허위 과장 광고' 등을 명분으로 제재에 들어갔지만 투자자 보호는 어려웠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수익형 부동산'을 자본시장법상 금융투자상품의 하나(투자계약증권)로 보고 증권신고서(분양계획신고서) 제출, 투자설명서 제공, 등 증권투자와 동일한 투자자 보호 규제를 적용하라고 조언한다.


'형식(form)'보다 '실질(substance)'이라는 미국의 사례까지 소개해준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포괄주의보다 우아한 보신주의를 택한다.

P2P 금융도 비슷한 예다. 디지털 전환 속 빠르게 성장한 P2P 금융을 품지 않으려 하다 대출 사기 등의 부작용이 커지자 뒤늦게 법제화한다.

기존의 '공모' '여신'을 토대로 한 포괄적 규제 대신 '온라인투자연계금융업 및 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을 만든다. 2020년 시행 된 법에 따라 오는 8월까지 '등록'해야 하는데 아직 없다. '심사'를 거쳐야 하는 등록이기에 '허가'와 같다. 보신주의는 포괄주의에 앞선다.

# 전세계를 흔드는 가상자산(암호화폐)을 대하는 자세는 더하다. 3년전엔 법무부가 때려잡겠다고 무대포로 나섰는데 이번엔 모든 정부 부처가 눈치만 본다.

정부 여당의 스탠스는 하나다. '외면과 방치'.

핑계도 뻔하다. "개별 국가가 (규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여당 고위 인사) "관여할 법적 근거가 없다"(금융당국 고위 인사) . 단골 메뉴인 법적 근거와 국제 동향 등이다.

가상자산 시장과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적극적' '창의적' 고민은 없다. 은행을 통해 가상자산거래소를 옥죈다. 익숙한 관치이자 진화된 관치다.

선진국 움직임을 참고하겠다면서도 미국이 증권법 적용 방침으로 강하게 대응하는 것은 애써 모른 척 한다.

형식(코인)과 실질(투자·수익 활동)이 존재하는데 이번엔 법적 정의(定義·definition)를 따진다. 법적 정의가 애매해 규제 사각지대와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한 포괄주의는 '법적 정의'를 따지는 보신주의 앞에서 무력화된다. 치열하게 아무 것도 안 하기 위해 애쓰는 당국의 노력이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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