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 바느질은 달라요"...46년 봉제장인과 한수원 사장의 만남

머니투데이 민동훈 기자 | 2021.05.12 05:44
서울 동대문 창신동 '창신 데님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소잉마스터 아카데미' 수강생이 봉제사로부터 봉제기술을 배우고 있다./사진제공=창신 데님연구소
"청바지는 바느질의 기초부터가 달라요. 학교나 학원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에요."

한때 한국 봉제산업의 1번지로 불리며 패션메카 동대문을 주름잡던 창신동 봉제거리. 봉제산업의 쇠퇴와 함께 잊혀진 거리로 여겨졌던 창신동 봉제거리가 최근 청바지(데님) 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1970~80년대 전 세계 패션산업을 주름잡던 창신동 봉제 장인의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찾을 수 있어서다. 2018년 서울시의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했던 청년 대상 '소잉마스터 아카데미'가 한국수력원자력의 지원을 받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2018년 시작해 올해 4기 학생들을 맞이한 소잉마스터 아카데미는 국내에서 데님관련 전문 봉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이곳에서 소잉마스터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창신, 데님연구소' 차경남 대표 역시 46년 경력의 '소잉마스터(봉제사)'다. 6.25 전쟁 후 월남해 동대문서 봉제일을 시작한 부모님을 따라 가위를 잡았다는 차 대표는 사양화로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한 봉제기술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차경남 창신 데님연구소 대표가 머니투데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민동훈 기자 /사진=민동훈
후배들에게 무상으로 기술을 전수해 주고 싶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상황. 그때 서울시가 창신동 봉제거리를 도시재생 1호사업으로 지정하면서 길이 열렸다. 당시 서울시 도시재생본부장을 맡고 있던 진희선 전 서울시 행정2부시장이 "지역산업이 활기를 띄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도시재생"이라며 봉제산업 진흥을 위해 청년들에게 기술전수 프로그램을 기획하던 차 대표에게 힘을 실어줬다.

차 대표는 "끊어질 뻔한 데님 봉제기술을 열정 가득한 청년들에게 전수할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차대표의 뜻에 감명받은 원단업체, 워싱업체 등 청바지를 만들기 위해 협력해야 할 수많은 업체도 십시일반으로 참여했다. 가장 큰 문재는 재원이었다. 초창기엔 서울시에서 교육비와 재료비 등을 지원했다. 그러나 강의할 장소 임대료와 실습에 필요한 봉제기계 가격이 문제였다. 데님 작업이 가능한 봉제기계의 경우 대당 가격이 2000만~3000만원 수준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알게된 한국수력원자력이 지원에 나섰다.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 시절 산업인력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정재훈 한수원 사장이 소매를 걷었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 사장시절부터 눈여겨 본 '소잉마스터 아카데미'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챘다. 필요한 기계를 구매할 수 있도록 자금지원에 나섰다. 한수원은 교육비와 재료비 뿐 아니라 청년 디자이너의 옷을 만들어 기부하는 등 일감을 제공하는 방식의 지원도 병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 사장은 시간이 날때마다 창신동을 찾아 소잉마스터 아카데미 수강생들을 격려하고 청년들이 만든 청바지를 구매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챙겼다. 서울시가 지원을 끊은 상황에서도 소잉마스터 아카데미가 매년 수강생들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수원의 지원 덕분이라는 게 창신동 봉제사들의 한목소리다.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서울 동대문 창신동 소재 '창신 데님연구소'를 찾아 '소잉마스터 아카데미'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사진제공=창신 데님연구소

차 대표는 소잉마스터 아카데미를 통해 이러한 창신동의 문화적 유산과 수많은 봉제 장인들의 노하우를 청년들에게 전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과거 한국이 세계 섬유패션의류 제조기지 역할을 담당하던 시절, 동대문과 창신동 일대는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봉제사들이 한 곳에 모여있던 봉제산업의 클러스터였다. 지금은 쇄락했지만 여전히 30~40년 이상된 봉제장인들이 현역으로 뛰고 있는 곳이 창신동이다. 동대문 인근 자재 시장과 공장, 서울패션위크가 열리는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이 가까운 만큼 청년 디자니어가 정착하기에 매력적인 입지기도 하다. 차 대표는 이 곳을 "데님 벤처 클러스터"라고 했다.


차 대표의 열정은 청년들에게 희망이 됐다. 실제로 수료생 가운데 디자이너 브랜드를 열거나, 소호창업에 나선 이들도 상당수다. 단순히 봉제기술만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의류 제조, 유통, 판매의 기초부터 다질 수 있도록 하고 있어서다. 덕분에 소잉마스터 아카데미는 이미 국내 데님 창업을 꿈꾸는 청년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글로벌 청바지 업체에서 일하며 데님 창업을 꿈일던 청년부터 패션을 전공한 학생, 디자이너 지망생 등이 소잉마스터 아카데미를 찾는다. 한정된 예산, 공간의 문제 탓에 많은 수강생들을 받을 수 없는 까닭에 모든 지원자를 받아 줄 수 없는 것이 아쉬운 상황이다.

'창신, 데님연구소'에서 이달 7일 차경남 대표(왼쪽 아래)가 1기 수료생, 4기 수강생 등과 대화를 하고 있다. /사진=민동훈 기자 /사진=민동훈
소잉마스터 아카데미 1기 수강생들이 모여 론칭한 데님 브랜드 'G.M.H(구미호)'가 대표적인 청년 창업 사례다. G.M.H를 이끄는 디자이너는 모두 90년대 생이다. 이한율 G.M.H 대표는 "봉제 공장 현장과 다양한 데님 봉제기술을 한자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물론, 사업에 필요한 거래처 확보 등 패션 산업 노하우도 전수받을 수 있다"면서 "소잉마스터 아카데미를 통해 알게된 봉제산업 관계자로부터 원단구매, 워싱, 샘플제작 등 다양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역시 1기 수료생 출신으로 딜레탕티즘(DILETTANTISME)이라는 데님 브랜드를 론칭한 박지영 대표는 "패션산업은 사실 원료부터 제작, 마케팅, 판매까지 알아야 하지만 이런 것들은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다"며 "소잉마스터 아카데미는 꿈만 꾸던 창업을 현실로 바꿀 수 있었던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오른쪽 끝)이 서울 동대문 창신동 소재 '창신 데님연구소'를 찾아 수강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제공=창신 데님연구소
지금 창신동 일대 봉제공장 사장들은 서울봉제산업협회장을 역임한 차 대표의 설득에 청년 디자이너의 30~40장 수준의 소량 일감도 받아주고 있다. 물량이 적은 만큼 이윤이 남지 않아 사실상 무상서비스인 셈이다. 아울러 소잉마스터 아카데미 수료생들이 만든 데님 작품을 대외적으로 알릴 수 있는 홍보도는 물론, 매년 열리는 상생패션런웨이 등과 같은 패션쇼에 수료생 작품을 출품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차 대표 "어려운 상황속에서 한수원의 지원으로 봉제기술의 명맥이 끊기지 않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면서도 "청년들이 창업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을 지원하는데 공공기관 뿐 아니라 정부, 민간기업도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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