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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이어 프랑스·이탈리아도 "해법 아니다"━
아울러 메르켈 총리는 EU가 지금까지 백신을 상당량 수출했으며, 이게 다른 국가의 규범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유럽위원회(EC)에 따르면 EU는 지금까지 코로나19 백신 약 2억 도스를 수출해왔다. EU 역내에 인도한 것과 유사한 규모다. 반면 미국에선 백신이 국외로 인도된 경우가 거의 없다. 총리는 미국 인구의 상당수가 백신을 접종했기 때문에 이제 미 정부가 백신 및 백신 원료에 대한 수출을 늘릴 때가 됐다고도 했다.
미국에 반기를 든 독일에 이어 프랑스 등 유보적이던 EU 국가들도 이번 정상회의를 계기로 부정적 입장을 드러냈다. 미국의 수출 규제 종료가 먼저라는 게 공통 입장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정상회의 후 기자들에게 "특허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유효하나 단기간에 더 많은 백신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다른 조치들이 필요하다"며 "미국에 백신뿐 아니라 백신 원료에 대한 수출 규제를 끝낼 것을 매우 명확히 요청한다"고 말했다. "우리에겐 기업들의 창의력 및 혁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특허권 보호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도 이날 오전 "EU는 기꺼이 미국의 제안을 논의할 수 있다"면서도 "백신 지재권 면제가 빈국들에 '특효약(magic bullet)'이 되지 않을 것"이라 밝혔다.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 역시 "백신을 자유롭게 하기 전 미국과 영국이 수출 규제를 없애는 등 더 단순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며 "(특허 면제가) 백신 생산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EU) 정상들 사이에 특허권 유예를 지지하는 데 대한 전반적인 망설임이 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지재권 면제의 역설이 있을 수 있다며 "지재권 유예를 보장해 생산을 늘릴 수 있으나 이 지재권 유예가 현존하는 글로벌 백신 공급망을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화이자, 모더나 등이 개발한 메신저 리보핵산(mRNA) 백신은 19개국에서 공수된 280개의 원료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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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특허 풀려도 백신 만들기 어렵다"━
바이든 정부가 입장을 선회한 건 외교적 이유와 미국 내 정치적 요인이 두루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이 이른바 '백신 외교'로 개발도상국에 백신을 제공하며 국제적 영향을 확대하는 상황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 일차 배경으로 꼽힌다. 국내적으론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등 민주당 내 진보진영이 백신 지재권 공유를 요청해 온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대통령 자신도 대선 기간 백신 기술 공유를 공약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바이든 정부의 이 같은 입장 발표는 EU를 곤혹스럽게 했다. 백신 개발 선진국을 향해 '백신 무기화', '백신 제국주의' 등의 비판이 가해지는 상황에서 EU와 한 배에 타고 있던 미국이 이탈한 셈이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이 EU 중 앞장서 반대하는 건 독일 제약사의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걸려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화이자와 백신을 공동 개발한 바이오앤테크가 독일 기업이며, 또다른 독일 제약사 큐어백은 전세계 세 번째 mRNA 백신 개발 성공이 임박한 것으로 알려진다.
EU 내부에선 미국의 일방적인 발표에 대해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FT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이 같은 방침을 5일 발표 바로 직전에야 EU에 알렸으며 사전에 논의나 공조하려는 시도가 없었다고 한다.
한 EU 관계자는 특허 면제가 돼도 백신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갖춰진 곳은 극히 제한적일 거라는 점을 지적한다. 코로나19 백신 관련 80~100개의 특허는 mRNA 백신을 만드는 것과 관련돼 있는데, 특허 공개가 어떻게 백신을 만드는지 알려주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지재권 유예의 이행까지는 절차적, 기술적인 어려움도 있다. WTO 내 지재권 유예가 통과되려면 164국에 달하는 WTO 회원국이 모두 찬성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EU가 부정적 입장을 밝힌 데다 제약사들의 동의도 필요하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논의가 이뤄진다고 해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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