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타임스'부터 'AP통신' '로이터통신'등에서 근무한 검은 머리 사진기자가 있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35년 동안 사진을 촬영했다. 백악관 출입에서부터 LA 폭동, 이라크 전쟁, 9·11테러 등 굵직한 사건의 현장에 있었다. '사진기자의 꿈'이라고 불리는 퓰리처 상도 두 차례나 탔다. 강형원 기자(57)가 그 주인공이다.
강 기자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진기자다. 강 기자가 촬영한 사진이 여러 차례 외신 1면에 실렸으나 모두 'Hyungwon Kang'(강형원)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촬영했다. 자신을 '미국 머리에 한국의 영혼'으로 소개하는 강 기자는 퇴직 후 아예 한국으로 건너왔다. 강 기자는 4일 머니투데이와 통화에서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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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간 미국 언론사 누볐지만…그의 이름은 언제나 '강형원'이었다━
1987년에는 한국으로 파견돼 6·29항쟁과 첫 대통령 직선제를 취재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도 셔터를 눌렀다. 민주화운동 현장을 취재하다 경찰로 오해받아 시위대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1992년 미국 LA폭동 당시에는 총을 들고 자신을 지켰던 한국 교포들의 모습을 담았다. 노력을 인정받아 첫 번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99년에는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과 르윈스키 스캔들 보도로 두번째 퓰리처상을 받았다. 두 차례나 수상하면서 미국 내에서도 유명세를 탔다. 강 기자는 열정을 인정받아 백악관 사진부에서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강 기자는 1988년 북한과 중국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 국적까지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획득했다. 대신 모든 기사를 한국 이름인 '강형원'으로 쓰기로 했다. LA타임스 1면에 강 기자의 사진이 실릴 때에도 어김없이 '강형원'의 이름이 달렸다.
강 기자는 "동료 기자들이 '왜 미국 이름을 안 쓰느냐'고 물으면 미국 사회에 한국 이름을 익숙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며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정신이 한국이라는 것은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주신 이름을 함부로 버릴 수 없었다는 것도 이유다.
강 기자는 북한 방문부터 한국 대통령 취임식·방미 등 한국 관련 취재가 있으면 자청해서 현장을 찾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 한국의 문화적인 깊이를 아는 사람이 취재해야 더욱 깊이 있는 사진이 나온다는 신념 때문이다.
미국 사회에서 한국의 인상이 '전쟁을 치른 국가'로만 알려져 있는 것에 대한 반감도 한몫했다. 강 기자는 "최근 K-팝이나 한류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지만 영미권에서는 전쟁을 치렀던 신생 국가에 불과하다"며 "자신들의 문화만이 오래되었다고 주장하는 영미권에 한국 문화를 '만국 공통어'인 사진으로 알리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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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부터 삽살개까지'…퇴직 후 고국으로 무대 옮긴 사진기자의 진심━
강 기자는 "머리가 닿는 곳이 집이라는 생각으로 매일같이 전국을 누비고 있다"며 "지난해 6월 말에 방한해 14일간의 코로나19 격리를 거친 후 7월 2일부터 활동을 시작했는데 벌써 총 이동거리가 2만km가 넘는다"고 했다. 그의 카메라에는 독도·제주도 등 자연환경과 삽살개·진돗개 등 다양한 피사체가 담겼다.
강 기자의 사진을 가장 관심있게 지켜보는 이들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이다. 강 기자는 항상 이민을 갔던 사람들이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받지 못해 자신의 뿌리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왔다. 그는 그들을 위해 석기시대 유산인 울주 암각화부터 몽골 침략군에 맞서 싸운 삼별초 유적까지 한국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들을 촬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강 기자는 "이역만리에 살고 있는 한인들에게 왜 모국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유를 알려주고 싶다"며 "백 마디의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직접 발로 뛰어 한 사람이라도 더 한국에 대해 알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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