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건 없고, 중요한 건 멋진 몸이겠죠?"(사진 작가님)
'이런, 그걸 준비 못 했는데 어쩌지요.' 그런 생각에 괜히 주눅 들었다. 밖으론 말 못 하고 속으로 삼킨 뒤 전화를 끊었다. 생애 첫 '바디 프로필'을 찍기로 한 뒤 상담하던 중이었다. 멋진 몸이라, 멋진 몸, 멋진 몸……. 예약한 사진관 SNS에 올라온 왕(王)자 빨래판들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그리곤 내 뱃살을 어루만졌다. 고개를 떨궜다.
마흔이 되기 전엔 내 몸을 기록하고 싶었다. 39년 동안 써왔던 몸. 매일 일으켰고, 어딘가를 향해 걸었고, 밥을 먹었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눴고, 공부했고, 지금은 부단히 일하고 있는. 오래 썼고 앞으론 세월이 켜켜이 쌓여 또 변해갈 테니 한 번쯤은 저장하는 셈 치자고. '버킷리스트'라 여겨 언젠가 하려 했건만, 정신 차려보니 어느덧 서른아홉 번째 봄, 불혹(不惑)이 코 앞이었다.
"그럼, 그날 뵙겠습니다." 예약금 2만원을 덜컥 입금하니 촬영 날짜가 확정됐다. 3월 8일 월요일. 그러니까 4일 뒤. 남들은 석 달 전에 예약하고 몸을 만든다는데 어쩌나.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밀려왔으나 이미 일은 저지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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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몸'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샤워할 때 거울 앞에 서면 익숙한 내 몸은 이랬다. 가슴은 쳐져 365일 울부짖고, 배는 볼록하고, 가슴과 배를 합쳐서 보면 '메롱' 하고 놀리는 표정 같고, 턱은 인심 좋고, 근육은 꽤 빠졌고, 피부는 하얗고. '이건 만족스럽지가 않아', 늘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시선을 애써 피했던 것 같다.
사진을 찍을 땐 측면이 편했고, 터틀넥으로 턱살을 가렸었다. 큰 옷으로 뱃살을 감추고, 벨트를 조이기도 하고, 앉을 때도 힘주는 게 조금은 습관이 됐달까. 불만족스러웠다.
그 와중에 '근거 없는 자신감(근자감)'만 있어서 원하면 언제든 몸을 만들 수 있다고. 그러니 금방이라도 도달할 것 같은 지점을 생각했었고, 그에 미치지 않았던 내 몸은 늘 만족스럽지 않았다. 언젠가 꼭 해야 할 숙제처럼 따라다녔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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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 또한 노력한 거라고━
'그 또한 나인 걸.' '그렇다고 건강을 해친 건 아니니까.' '왜 어떤 몸이어야만 괜찮다고 생각하니.' '사느라 그렇게 된 것뿐이잖아.' '하루가 너무 고단해서, 저녁을 먹으면 움직이기 힘들었던 거잖아.' '아침 일찍 일어나 처음 누운 거였잖아.' '살아내느라 만들어낸 몸이니까.'
그리 생각하니 지금 내 몸 또한 노력해서 이뤄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매일 땀 흘려 달리거나 쇳덩이와 싸우진 않았으나, 지금까지 삶의 과정이 고스란히 다 담긴 거라고. 좋은 몸도 있지만, 그냥 나 같은 몸도 있는 거라고.
마음을 먹었다가 그래도 싫었다가, 그런 과정을 몇 번 거친 뒤엔 결심이 서게 됐다. '바디 프로필'을 찍어보자, 미워했던 내 몸을 멋지게 기록하자, 그런 마음으로 예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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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은 '행복하고 건강한 돼지'━
재택근무라 점심은 견과류나 두유로 간단히 먹었다. 저녁엔 집밥을 차려 먹거나, 바깥에서 사 먹었다. 아내가 직장서 일을 많이 한 날엔 즉석 떡볶이에 소주 한 잔을 했고, 내가 힘들었던 날엔 좋아하는 햄버거를 먹었다. 그러면서 영화나 예능 한 편을 보고 있자면 기분이 풀렸다.
운동은 일주일에 2~3번 정도는 했다. 너무 살이 찌지 않도록 경계하는 정도. 주로 동네서 달리기를 30분 정도 했다. 너무 힘들진 않은 강도로 하려 했다. 고되기 시작하면 하기 싫어지니까. 경쾌하게 달리며 동네 고양이 밥자리도 살피고, 가까워진 봄 내음도 마셨다. 뛰면서 몸이 어느 정도 무거워졌는지도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러니 바디 프로필 사진 컨셉은 '행복하고 건강한 돼지'랄까. 그게 그냥 내 모습이었다. 고민하지 않고, 얼마든 오래 유지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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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몸을 기록하고 싶어서 왔어요━
스튜디오 문을 열 땐 좀 떨렸다. '뱅뱅 우후아하~(가사 모름)' 하는 신나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백색 벽과 근사한 카메라 장비들. 잠시 뒤엔 저기 서 있겠지 생각하니 두근두근.
촬영 컨셉을 얘기한 뒤 시작한다고 했다. 사진 작가님(그리고 사장님)과 나란히 앉았다. 일단 고백부터 했다. 몸을 만들어 온 건 아니고, 그냥 기록하고 싶었다고. 내년에 마흔인데 30대가 가기 전에 한 번쯤은. 그런 취지라고.
작가님은 "요즘엔 그런 분들이 좀 늘었다"고 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을 때 모습을 남기고 싶다며 온단다. 그러니 주눅 들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어떤 분위기로 할지 정하자며 사진 몇 장을 보여주는데, 그 안에 헐크 한 분이 서 계시는 것 아닌가. 내 동공이 흔들리는 걸 봤는지, 작가님은 "이 정도로 몸 만드는 분은 몇 안 된다"며 날 안심시켰다.
마음을 다시 가라앉힌 뒤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탈의실엔 5kg짜리 아령 두 개가 있었다. 근육을 급히 성나게 하는 용도였다(전 이미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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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찍을 수 있는 거였다━
마구잡이로 자세를 취했다. 일단 어떻게 찍히는지 모르니, 에라 모르겠다 하며.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서고, 오만한 표정도 짓고, '난 치명적이다'라며 몹쓸 자기 암시를 했다. 작가님은 "좋아요!" "굿굿" "오케이" "오, 그런 것도 좋아요"하며 날 북돋아 줬다. 처음 찍는 것치고 잘한다고 했다(마이 힘드셨죠).
그다음엔 안경도 벗어보라고 했다(Ah). 왜 그러냐 그랬더니 "사진 작업이란 건 변화를 주는 것"이라며. 어색할 순 있어도 다른 이미지가 나올 수 있어 재밌다고. 그의 말마따나 안경을 벗으니 세상이 흐릿해져 더욱 자신감이 넘쳐 기세등등해졌다.
맨몸에 가방을 메어보기도 했다. 취재 갈 땐 늘 메고 다녔으니. 살에 닿는 느낌이 이상했다. 어깨 한쪽에만 살짝 걸치고, 다시 카메라를 삼킬 듯 쏘아봤다. 그랬더니 작가님이 "이번엔 카메라 보지 마시고"라고 했다. 긴장은 점점 풀려 포즈가 편해졌다.
실은 바디 프로필도 누구나 찍을 수 있는 거였다. 멋진 몸이 아녀도, 멋지게 찍고픈 마음은 있으니까. 그걸 실행하고 있다는 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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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끝나면 떡볶이가 국룰━
이번엔 흰 셔츠를 입고 단추는 푼 채 앉아서 노트북을 들었다. 작가님 가이드에 따라 다리 한쪽은 내렸다. 그의 말대로 했더니 "스마트한 모습, 섹시한 모습을 해달라"고 했다(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가운데 손가락'으로 안경을 들어 올려보라고도 했다. 그런데 충실히 수행하니 작가님은 "어, 저한테 (손가락 욕) 하시는 거 아니죠?"하며 당황해했다.
막바지 촬영만 남았다. 속옷만 입고 뒷모습을 찍었다. 살면서 볼 일이 거의 없었지만, 늘 부단히 절반의 역할을 해줬던. 누군가 안아줄 때만 비로소 온기가 닿았던. 마지막 컷은 뒤돌아서서 내 몸을 토닥이듯 감싸 안아 자세를 취해 찍은 뒤 촬영을 마쳤다. 1시간 정도 진행된 촬영이었다.
고생했단 말이 오간 뒤 작가님은 내게 "오늘 뭐 하시냐"고 물었다. 별 계획 없다고 했더니 "바디 프로필 찍은 날은 떡볶이를 먹는 게 국룰"이라고 했다. 아마 먹는 걸 한껏 참았다가 오는 분들이 많아 그랬으리라. 그러나 난 평소처럼 먹었기 때문에 굳이 당기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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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꽤 멋진데?━
음영이 드리운 몸의 굴곡, 차마 숨기지 못한 뱃살과 턱살. 처음엔 어색해서 육성 웃음이 터졌다가, 가만히 바라보니 여러 상념이 오갔다.
'이 몸을 39년이나 썼구나. 그 안에선 심장이 쉼 없이 뛰었구나. 팔과 다리도 참 많이 움직였겠구나. 고민은 또 얼마나 했는지. 어느새 10년째 사회생활을 하느라 표정도 꽤 많이 굳었구나. 잘 몰랐던 뒷모습은 이랬었구나.'
몸이란 건 생존을 위해서만 늘 쓰고 또 씻고 다시 사용했었다. 그러다 모처럼 멋있게 하고 찍어주니, 나도 꽤 괜찮구나란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찍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원본 사진 5장을 골라 보낸 뒤 이틀 뒤에 보정된 걸 받았다. 다른 보정 요청은 안 하고, 사진 색감과 분위기만 손봐달라고 했었다. 작가님은 "남성들은 몸을 키워달라는 요청이 가장 많고, 여성들은 얼굴 보정이 가장 많다"고 했다. 다른 사람 몸과 자신의 얼굴을 합성해주면 안 되느냐는 무리한 요구도 있다고.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듬는 건 많이 안 할수록 좋아요. 원석이 제일 좋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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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몸도 다 괜찮다, 사느라 그런 거니━
그 생각에 작은 '균열'을 내고 싶었다. 그렇지 않은 몸이 더 많으니까. 뚱뚱하고, 말랐고, 키가 크고, 또 작고, 다리가 길거나 짧고, 뱃살이 많거나 적고, 머리가 크거나 작다. 너무나 다양한 몸인데, '좋은 몸'이란 건 정답처럼 정해져 그것만이 주로 세상에 드러나니까. 아무렴 어떠하랴. 부모님이 주신 귀한 몸이니.
그러니 어떤 몸이어도 괜찮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내 몸엔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가 다 깃들어 있으니까. 납작한 내 뒤통수엔, 어릴 때 눕혀놓기만 하면 움직이지도 않고 반듯이 잤던, 순한 내 어린 시절이 담겨 있다. 손목에 남은 흉터는 신혼여행 때 철조망에 긁힌 거라 설레는 추억이다. 또 키에 비해 길지 않아 속상했던 다리로는 전국을 누비며 취재를 다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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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가 아닌, 내 가치를 아는 것━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해외서 진행했던 실험 얘길 했다. 자기 외모에 열등감이 있는 한 손님이 있었다. 그는 백화점에서 예쁜 마네킹에 걸린 옷을 사지 않았다. 그때 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손님은 굉장히 지적이신 것 같아요." 그렇게 그 사람의 가치를 얘기해주니 그제야 물건을 샀다고.
그러니 "자기 가치를 인식하고, 스스로 감탄할 부분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자기보다 외모가 더 나은 이들은 늘 있기에. 그러면서 김 교수는 "외모의 아름다움과 상관없는 자신의 가치를 아는 순간,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거울 앞에 서서 김 교수의 말대로 연습을 해봤다. 내 모습을 봤다. 나보다 잘생긴 사람들이, 몸이 멋진 이들이 떠올랐다. 너무너무 많다.
지난번에 썼던 기사를 떠올렸다. 형편이 어려운 와중에도 버려진 장애인과 강아지, 고양이를 돌보는 목사님을 찾아가 취재했었다. 기사가 나간 뒤 후원금이 많이 모였다. 몇 번이고 내게 연락해 "감사하다"고 했었다. 그를 외면하지 않고 고민해 필요한 글을 써서 관심을 모은 사람. 내 가치는 그런 거구나 생각했다.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다시 거울을 보니, 괜스레 더 멋져 보이는 게 아닌가. 거짓말 같다면 지금 당장 해봐도 괜찮다. 당신만의 가치가 분명 있으니까. 정말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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