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가 있다. 권 사장이 6년 전 HE사업본부장(당시 부사장)으로 TV 사업을 총괄하게 됐던 때다. 당시 출시 3년차에 들어서도 판매가 신통치 않았던 커브드 TV를 두고 권봉석 당시 본부장이 개발 중단을 선언했다.
지금은 화면을 말거나 접는 TV와 스마트폰까지 나왔지만 당시엔 TV 화면 중앙이 오목하게 들어가도록 구부리는 것만 해도 첨단의 기술이었다. 커브드 TV는 한국업체들의 기술력을 상징하는 제품으로 통했다.
IT·전자업계에서 기술력을 상징하는 제품은 당장의 판매 실적을 크게 개의치 않는 경향이 있다. 기술력을 홍보하는 효과만으로도 적잖은 실익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화면을 접을 수 있는 갤럭시폴드 시리즈를 출시하기 전까지 스마트폰의 엣지 디스플레이를 한사코 고수했던 데도 이런 탓이 컸다. 더구나 당시 커브드 TV는 LG전자는 물론, 경쟁업체인 삼성전자에서도 차세대 주력제품으로 밀던 제품이었다.
권 사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커브드 TV는 주력 제품이 될 수 없다. 커브드 TV 대신 다른 제품을 제대로 만들테니 잘 팔아달라."
최근 LG전자의 휴대폰 사업 철수설을 두고 커브드 TV 개발 중단 당시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6년만에 LG전자 CEO로 올라선 권 사장은 지난 20일 임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다시 한번 선택과 결단을 시사했다.
커브드 TV를 접었던 때와 견주면 휴대폰 사업은 언제 중단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LG전자의 휴대폰 사업을 담당하는 MC사업본부는 2015년 2분기 이래 23분기 연속 영업적자를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누적 영업적자가 5조원 규모다.
휴대폰처럼 굵직한 사업을 정리하는 게 순전히 권 사장의 결단만으로 이뤄질 리는 없다. 최종 결단은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손아귀에 있다. 다만 시장에선 실무 책임을 진 권 사장의 스타일과 커브드 TV 당시의 전례를 먼저 본다.
LG전자 MC사업본부 전략기획팀 출신으로 KAIST 소프트웨어대학원 교수를 거쳐 빅뱅엔젤스를 창업한 황병선 대표는 "지난해 출시한 윙 같은 모델에서 여전히 기본기보다는 뭔가 특이한 것을 추구하는 피처폰 시대의 마인드가 엿보인다"고 말했다.
권 사장은 올 초 신년사에서 '파괴적인 변화'를 말했다. "'X+α'를 통해 'Super X'를 만드는 점진적 성장을 뛰어넘어 'X+α'를 통해 'Y'를 만드는 파괴적인 변화에 집중하자."
최근 커브드 TV 시장은 중국 등 일부 시장이나 게이밍용 모니터 중심의 틈새 시장으로 쪼그라들었다. 6년 전 권 사장의 결단은 시장을 꿰뚫어본 혜안이었던 셈이다. LG전자는 이르면 오는 3월 휴대폰 사업의 향방에 대한 결론을 내놓는다. 권 사장의 현실주의가 다시 절실한 시기다.
[저작권자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