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수는 남는다…‘붕어빵 법안’ 찍어내도 입법왕 눈도장

머니투데이 박종진 기자, 서진욱 기자, 김상준 기자 | 2021.01.05 05:33

[the300][과잉입법-국회의 민낯]<1>-④시민단체·정당 등 ‘줄 세우기식’ 정량평가…실적·공천 목숨 건 의언 ‘과잉입법’ 부채질

(서울=뉴스1) 박세연 기자 = 지난해 9월24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의원들이 투표를 위해 줄을 서 있다. 2020.9.24/뉴스1

“영감(국회의원)이 ‘우리는 통과 상관 없으니까 건수로 승부 한다’ 이렇게 선언하는 경우도 있다”

국회생활 15년 차인 A 보좌관은 ‘과잉입법’의 문제점은 알고 있으면서도 법안 발의 건수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수없이 경험했다. A 보좌관은 “의원 자신이 어떻게든 이름을 알리고 싶은 것”이라며 “여기에는 시민단체와 언론 등이 발의 건수로 의원을 평가하는 것도 영향이 크다”고 밝혔다.

발의 건수에 얽매이지 않는 의원실이라 해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13년 차 B 보좌관은 “기본 건수는 채워야 한다, 꼴찌는 피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린다”고 말했다.


당해→해당 바꾸는 법안도 ‘실적 1건’…발의, 또 발의 기막힌 국회


300명 의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숫자에 신경 쓰는 와중에 우리나라 국회는 어느새 해외 주요 선진국들에 비해 1인당 발의 법안이 많게는 수십 배 이상 넘쳐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초선 의원은 “국회에 와보니 상임위 회의 들어가기 전에 상정되는 법안들을 한번 살펴보기도 벅차다”고 말했다. 한 중진 의원은 “우리 현실에서는 자기가 낸 법안도 다 기억하기 어렵게 된다”고 꼬집었다.

법안은 쏟아지지만 뜯어보면 한 줄 추가, 단어 하나 바꾸기 식의 개정안이 많다. 한 글자만 달라져도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는 게 법이지만 쟁점과는 무관한 법안 숫자 늘리기로 의심받는 경우가 상당하다.
제20대 국회 ‘입법왕’으로 불렸던 황주홍 전 민생당 의원은 무려 697건을 대표 발의했다. 하지만 이중 227개 법안은 같은 내용이다. 여성이 차별 없이 평가받도록 공공기관에 ‘유리천장위원회’를 설치하라는 문구를 각각의 공공기관 관련법 개정안으로 모두 별도 발의한 것이다.

이밖에 다른 의원들도 ‘당해’를 ‘해당’으로, ‘차주’를 ‘차용인’으로, ‘계리’를 ‘회계처리’로와 같이 용어 바꾸기 법안을 흔하게 낸다. 때맞춰 일몰기한 연장법을 이른바 ‘복붙’(복사해 붙이기)해 발의하는 것도 법안 숫자 채우기로 활용된다.

[서울=뉴시스]김선웅 기자 = 법제사법위원회, 국토교통위원회 등 9개 상임위원회가 열린 지난해 7월29일 서울 여의도 국회가 상임위 참석 부처 관계자들로 붐비고 있다. 2020.07.29. mangusta@newsis.com

물론 일본식 한자어나 어려운 말을 쉽게 바꾸는 법 개정도 의미는 있다. 그러나 일괄적으로 하면 될 일이다. 실제 지난해 한글날을 맞아 국회 법제실과 법제처, 국립국어원은 알기 쉬운 법률 만들기를 위해 용어 정비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보장구(補裝具, 순화어 ‘장애인 보조기기’), 전마용(傳馬用, 순화어 ‘연락용’) 등 416개 법률용어를 선정해 이 용어가 들어간 663개 법률을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별로 일괄 개정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일부 의원들은 이마저 개별 법안으로 대표 발의해 실적 올리기를 위한 꼼수로 쓰고 있다.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작 필요한 법안은 싸우느라 통과가 안 되고 불필요한 중복법안은 과잉으로 된다는 이 불일치가 한국 국회의 문제”라고 말했다.





‘숫자’에 의미 부여 평가방식, 과잉입법 부채질


과잉입법의 기본 이유는 법안 발의를 의원의 홍보 수단으로 여기는 인식 탓이 크다. A 보좌관은 “의정 보고에 실적을 넣고 외부평가와 기록으로 남기려는 욕심이 가장 크다”고 했다. ‘기록’을 담당하는 언론이 숫자에 상징성을 부여해 보도하는 행태가 부작용을 낳았다는 지적도 상당하다.

반복되는 ‘1호 법안’ 촌극이 대표적이다. 법안 발의 숫자든 순서든 주목 받는데 주력하면서 생기는 기현상이다. 제21대 국회에서는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보좌진이 의안과 앞에서 4박 5일 대기 끝에 1호 법안 타이틀을 쥐었지만, 정작 해당 법안(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기본법 제정안)은 제19대 국회 이후 세 번째 제출된 삼수 법안으로 여전히 계류 중이다. 국회 보좌진들은 언제부터인가 언론이 1호 법안을 기사로 써주기 시작하면서 밤샘 접수 경쟁이 붙었다고 입을 모은다.

여전히 숫자로 줄 세우는 평가방식도 과잉입법을 부채질한다. 지역구 의원실의 C 보좌관은 “지역 언론에서 도내 의원들을 대상으로 지난 1년 동안 법안 발의 1등부터 순서대로 열거하면서 기사를 쓰는데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서울=뉴스1) 김명섭 기자 = 지난해 4월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 의원 보좌진들이 사무실을 정리하며 21대 국회를 준비하고 있다. 2020.4.22/뉴스1
시민단체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제20대 국회 종합평가로 의원들에게 상을 준 A 시민단체는 본회의 표결 참여율, 상임위 출석률 등과 함께 법안 대표발의 성적을 주요 평가 기준으로 내세웠다. 2016년 제19대 국회를 종합평가하면서 낙제점 의원들을 선정한 B 시민단체 역시 법안 대표발의 건수를 활용했다. 법안의 내용과 파급력 등을 심사하는 정성평가는 전문성이 요구되고 공정성과 객관성을 갖추기가 어렵다. 손쉽게 비교가 가능한 정량평가가 주로 활용되는 이유다.

정당 내에서조차 대표발의 건수는 의정활동평가에 반영된다. 국회의원들의 목숨줄인 공천에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과잉입법을 부를 소지가 있다. 민주당의 경우 지난 총선을 앞두고 소속 의원을 상대로 수행실적자료를 제출받을 때 대표발의 법안이 포함됐다.

정당과 언론, 시민단체 등이 의원을 평가하는 방식부터 달라지는 게 급선무다. 국회 한 수석전문위원은 “정당과 시민사회에서 양적 평가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된다”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발의한 법안 중에 몇 개가 통과됐는지 비율로 따지면 함부로 아무 법안이나 발의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입법이 아니라 더 중요한 법안을 토론해 입법하는 의정활동이 높게 평가받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기존에 없던 제정법을 어렵게 새로 만들거나 쟁점이 큰 법안을 조율해 사회 갈등을 치유하는 건 숫자로 측정할 수 없는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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