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둘러싼 자연이 승패를 가르는 것이라면 같은 지역에서 난 사람의 흥망성쇠가 엇갈리는 일은 없다. 결국 성공의 열쇠는 사람이고, 그에게 깃든 기업가정신이 핵심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부호와 많은 기업인을 배출해 지난 2018년 한국경영학회가 '기업가정신의 수도'로 지정한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 승산부자마을도 마찬가지다.
삼성과 LG, GS, 효성, LS 등과 인연을 맺고 있는 지수면(智水面) 승산마을(LG 창업자 구인회, GS 창업자 허만정의 고향)은 진주 인근의 의령(삼성 창업자 이병철)과 함안(효성 창업자 조홍제)과 접한 지리산(智異山)에서 내려오는 물(水)이 재물처럼 갇히는 듯한 마을이라는 점을 빼면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를 바 없다.
지난 28일 진주 시내에서 택시로 30분을 달려 도착한 승산마을은 아침 물안개가 아직 덜 걷힌 한옥들이 모여 있는 조선시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동네였다.
오는 5월 9일 개교 100주년을 맞는 지수초등학교(당시명 지수보통학교)의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는 허성태 지수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은 "우리나라에서 한 초등학교에서 삼성과 LG, GS, LS, 효성 등 대기업 창업자를 많이 배출한 곳도 없다"며 "이 마을의 조상 대대로 전해져 오는 애국·애민의 가풍과 근검절약과 도전정신이 일궈낸 성과다"고 말했다.
600년 전 조선 초기부터 시작된 승산마을은 김해 허씨의 집성촌으로 시작돼 사돈을 맺은 능성 구씨가 18세기에 정착하면서 300여년의 동행을 이어온 마을이다. 만석꾼 두 집안(큰 승지 허준과 작은 승지 허만진)을 포함해 300여 가구에서 3만 8000석에서 많을 때는 6만석의 부를 일군 곳이다.
만석꾼이면 지금으로 치면 1만 마지기(200만평: 1마지기는 논 200평=660㎡) 규모로 여의도(87만평) 면적의 2.3배의 토지를 소유했다는 의미다. 이들은 승산마을 인근은 물론 의령과 함안, 합천 등 서부 경남 일대의 상당 부분까지 경제력을 뻗쳤다.
승산마을이 기업가 정신으로 더욱 눈길을 끄는 이유는 이들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과 이를 사회와 나누는 과정 때문이다.
GS그룹 창업자인 허만정 옹(翁)의 부친인 지신(止愼: 그치고 삼가다) 허준 선생(1844~1932)은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당대에 만석꾼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조선 24대왕 헌종 즉위 즈음에 태어난 그는 농사일을 나갈 때 남들이 볼 때는 짚신을 신고 가다가, 주위 시선이 없으면 짚신이 닳을 것을 염려해 손에 들고 다닐 정도로 근검절약을 생활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모은 재산을 77세 되던 해인 1920년에 자식과 조상, 동네주민, 국가 등 4등분해 나누도록 하고, 후손들이 이를 지키지 않을 것을 염려해 '허씨 의장비(義莊碑)'를 세워 후세가 잊지 않도록 했다.
의장은 일정한 토지를 마련해 거기에서 나는 것으로 친족을 돕거나 빈민을 구제하는 것을 말한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공동생산 토지를 뜻한다.
이충도 지수초등학교 총동창회 사무총장은 "당시 일곱 딸에게 20마지기씩(총 140마지기), 조상들의 묘지기 자본으로 140마지기 남기는 외에, 70마지기는 팔촌 이내 빈곤한 친척에게 주고, 120마지기는 문중의 의장자금으로 하고, 500마지기는 진주일신학당(현 진주여고)에 의연금으로 내고, 7000원(당시 쌀 한가마의 가격이 28원으로 250가마에 해당, 현재는 한가마에 약 22만원)은 궁핍한 자를 돕는 의연금으로 내놓았다고 의장비에 적혀 있다"고 했다.
앞서 1894년 갑오년에는 1만냥의 돈을 출연해 군량미를 조달하는데 쓰도록 했고, 같은 해 7월에는 곡식 100여섬을 출연해 마을사람들을 구휼한 것 외에도 일본의 수탈로 인해 세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전 마을의 세금을 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일도 그의 역할이었다.
허준 선생은 독립운동가인 백산 안희제 선생이 부산에 백산상회를 세워 독립군 자금을 지원하는데 경주 최부자 '최준'과 함께 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다.
그의 호인 지신처럼 '쌓은 부를 멈출 때를 알고, 스스로 삼갈 줄을 아는 삶'은 그의 둘째 아들인 효주 허만정 옹에게 이어져 이후 럭키금성(LG와 GS 분리 분할 이전)을 설립하는 연암 구인회 창업자와의 57년 동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효주는 사업자금과 함께 자신의 3남인 허준구(허창수 GS 명예회장의 부친)를 구인회 회장에게 맡겨 지난 2004년 계열분리 전까지 50여년을 잡음 없이 공동 경영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기업을 일궜던 선대의 정신을 이어받은 결과다.
또 다른 만석꾼인 '작은 승지' 허만진옹 자택 앞마당에는 '승산마을 금강산'으로 불리는 독특한 돌무덤이 아직까지 존재한다.
지신 허준 못지 않게 근검절약과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했던 허만진은 어려운 이웃들이 춘궁기에 먹을 양식이 없을 때는 그저 곡식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마을 인근 방어산에 있는 돌을 집 앞마당에 가져다 놓으면 그제서야 쌀 한되나 한말씩을 줬다고 한다.
쌀을 얻어가는 사람들이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쌀을 갖도록 해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할 목적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가져다 놓은 돌들이 쌓여 마치 1만 2000 봉우리의 금강산을 닮았다고 해 '승산마을 금강산'으로 불렸다.
구휼함에 있어서도 그 대상이 되는 이들의 마음까지 살피는 정신이 후대에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6.25 한국전쟁 때 후손이 유명을 달리하면서 그의 집터는 앙상해진 '금강산'만이 지키고 있었다.
허씨 문중이 근검절약과 성실함으로 애민정신을 높이며 가세를 일으켰다면 구씨 일가는 구한말 홍문관 대재학을 지낸 만회 구연호공의 애국정신이 기업가의 정신에 서린 경우다.
LG창업자인 구인회 회장의 할아버지인 만회는 고종의 총애를 받던 교리였으나,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조정에 전하는 간언이 힘을 잃자 관직을 버리고 승산마을로 낙향한 후 손자인 연암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세상과 담을 쌓았고 아끼던 손자 구인회가 진주 시장에서 포목상 문을 열었을 때와 순종 임금이 경부선 철도 개통을 기념해 부산에 순행했을 때 임금을 알현하기 위해 부산으로 외출한 것 등 두 차례를 제외하곤 죽을 때까지 승산마을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만회를 기리는 모춘당 기둥에는 만회가 내린 충효와 우애, 선비 정신 등을 강조한 가훈이 아직도 선명하다. 여기에는 ‘어버이 섬김에는 효성을 다하고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을 다한다’, ‘형제간과 종족 사이에는 서로 좋아할 뿐 따지지 마라’ ‘선대 훈계를 삼가 이어서 바르게 할 뿐 변하지 말라’, ‘선비가 세상을 살아감은 도를 좋아하고 분수를 지킴이다’ 등 10계 덕목이 새겨졌다. 이 정신은 LG 기업가 정신인 '인화' 속에 오롯이 흐르고 있다.
만회의 가르침을 받은 연암은 1921년 마을 앞에 개교한 지수보통학교의 1회 졸업생으로 이름을 올리고 한학에 이어 신학을 공부하면서 호연지기를 키워 서울 유학을 마친 후 진주에서의 포목상과 부산으로 넘어가 락희화학 등으로 일가를 이뤘다.
연암도 검소함이 몸에 배 담배를 필 때 고급과 저급 담배 두 종류를 갖고 있다고 손님에게는 고급 담배를 권하고, 자신이 필 때는 싼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그의 손자인 고 구본무 회장은 격식을 차리는 것을 상당히 싫어했지만, 사회에 기여한 이들을 기리는 ‘LG의인상’ 지원에는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진주시 관광진흥과 관계자는 "이런 선조들의 기업가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며 "지수초등학교 개교 100주년에 맞춰 오는 3월쯤 기업가정신교육센터를 완성하고 이런 기업가 정신을 더욱 함양하는데 힘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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