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품격 없는 보수, '국민의짐' 안 되려면…

머니투데이 박종진 기자 | 2020.12.17 05:30

[the300][종진's 종소리]

편집자주 | 필요할 때 울리는 종처럼 사회에 의미 있는, 선한 영향력으로 보탬이 되는 목소리를 전하겠습니다.

# '내가 누리는 것 중에는 당연한 게 없다.' 갓 입사한 수습기자들이 사내 게시판에 올린 자기소개를 읽어 내려가다 이 대목에서 멈췄다. 곱씹을수록 타당하다. 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얼기설기 얽혀 공동체의 일상을 지탱한다. 때로 누군가의 헌신이 구멍을 메꾼다. 이 사실 앞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신문사 입사할 때 작문시험 제시어 '부자'가 떠올랐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인 경주 최부자 얘기를 쓰면서 노무현 정부 당시 양극화 문제와 연결지어 졸고를 냈다. 사회가 바뀌고 정권이 수차례 교체됐지만 그때 답안지에 적었던 최부자 가문의 규율은 현재 핵심 화두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민생),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공정) 등이다. 1년 수확량의 3분의 2를 베풀던 이 집안은 일제에 나라를 뺏기자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바친다.

#보수는 본래 이념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다.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게 없는 공동체의 일상이 유지되도록 원칙과 질서를 중시한다. 그래서 법치와 공정은 보수의 가치다. 인간의 욕망과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그런 인간들이 모인 사회가 굴러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점진적 변화를 시도하는 게 보수다. 민생과 복지 역시 보수의 자산이다. 영국 보수당의 기틀을 만든 벤자민 디즈레일리 총리는 "오두막이 행복하지 않으면 궁전도 안전하지 않다"고 했다.

기존 체제를 뒤엎는 급진적 시도로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적 선동에는 반대한다. 겸손한 신중함을 추구한다. 미국 정치비평가 러셀 커크는 역작 '보수의 정신'에서 "보수주의자들은 무장한 교리와 이념의 통제에 저항한다. 비록 이 땅에 천국을 창조할 수는 없지만 이념에 사로잡히면 지구 상에 지옥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고 역설했다.

이념에 투철한 카리스마 대신 보수의 리더십, 품격은 헌신에서 나온다. 옥스퍼드대의 자긍심은 배출한 유명인사가 아니라 칼리지 입구 벽면에 가득 새겨진 1,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동문들의 이름에서 비롯된다. 이튼과 함께 영국의 양대 명문사립인 해로를 졸업한 처칠 총리의 동창 67명 중 11명이 1차 대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탄핵 후 4년, 한국 보수의 처참한 몰락은 진행형이다. 코로나 사태와 부동산 대란으로 민심은 들끓지만 국민들이 보수에 마음을 열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 부정평가가 치솟는데도 내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국민의힘 자체조사에서 여당 여론조사 1위 인물과 야권 인사들을 일대일 대결로 붙여보니 이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후문이다.


보수가 보수다워져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당 지지율, 인물난 따위는 결과일 뿐이다. 당장 인기를 끌 수 있는 이벤트나 정책, 새 얼굴 몇 명 내민다고 해결될 수준이 아니다. 민주화 이후 수십 년 간 곪아온 문제다. 시대와 호흡하는 정치를 치열하게 고민하기는커녕 박정희 산업화시대의 향수와 빨갱이 타령으로 용케 버텨오다가 계파 싸움으로 자멸한 대가다.

#보수의 가치, 근본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공정과 민생, 복지, 약자보호는 원래 보수의 존립근거다. 공동체를 보호·발전시키기 위한 유연한 노력, 공동체에 헌신이야말로 보수의 원동력이다.

2020년 한국 공동체는 벼랑 끝에 섰다. 방역과 경제, 외교, 그리고 민주주의의 총체적 위기다. 누군가 악착같이 제 식구, 자기편만 챙길 때 보란 듯 자기를 던지는 결단이 이 나라를 지켜왔다. 달콤한 환상을 속삭이는 포퓰리즘의 유혹으로부터 공동체와 민주주의를 지켜줄 보수의 깐깐함이 간절하다. 보수가 건강하면 사이비 진보가 백주 대낮에 사슴을 말이라고 우겨대는 일도 감히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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