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이건희의 마이바흐, 이재용의 팰리세이드

머니투데이 심재현 기자 | 2020.12.16 05:00

편집자주 |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 입니다.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례식 때 빈소를 찾은 수많은 차량 중에 취재진의 눈을 피해 빈소 지하주차장으로 직행한 차가 1대 있었다. 마이바흐 62S 랜덜렛. 생전 이 회장의 애마(愛馬)다.

이 회장은 2009년 함께 구입한 롤스로이스 팬텀보다 이 차를 더 즐겨탔다. 이 회장이 마지막으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보였을 때 탔던 차도 이 차다. 2014년 5월10일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한달여 전 일본 출장을 마치고 김포공항으로 귀국했을 때 이 차를 타고 이태원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2013년 점검 때 주행거리가 2만㎞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이 쓰러진 뒤엔 이따금 관리 차원에서 시동을 건 것을 빼면 줄곧 삼성전자 서울서초사옥 지하주차장 3층에서 주인을 기다렸다. 한창때 멈춰선 게 아쉬울 수밖에 없는 차다.

삼성에서 마이바흐는 고급 승용차 이상의 의미, 이 회장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통했다. 삼성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도 마이바흐를 탔지만 유독 '마이바흐는 이건희'였다. 가격만큼이나 압도적인 브랜드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고 일갈하던 '이건희 리더십'과 잘 맞아떨어졌다.

#. 이 회장의 별세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직접 현대차 팰리세이드에 자녀들을 태우고 빈소에 도착했을 때 세간의 관심이 쏠렸던 것도 그래서였다. 이 부회장은 지난 주말 이 회장의 49재가 엄수된 진관사에도 팰리세이드를 타고 나타났다.

이 부회장의 팰리세이드가 처음 공개석상에 모습을 보였을 때 재계 안팎에서는 이 회장 생전 자동차사업 진출로 어긋난 현대차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제스처라는 해석이 파다했다. 이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의 잦은 만남도 설득력을 더했다.

이 부회장과 삼성을 잘 아는 이들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말한다. 이 회장과 이 부회장은 다르다는 얘기다.


일찌감치 해외에서 공부한 이 부회장은 글로벌 마인드와 창의적 문화, 실용을 강조한다. 이 부회장이 잦은 해외 출장에도 불구하고 전용기를 팔고 수행비서 없이 홀로 다니는 것도 그래서다. 연초 시무식도 총수가 말하는 행사에서 듣는 행사로 바꿨다. 올봄 사재를 털어 중고로 구입한 팰리세이드 역시 그런 사고의 연장선이라는 설명이다.

#. 아버지와 아들의 성공 방정식이 같을 순 없다. 이건희 시대와 이재용 시대의 간극도 마이바흐와 팰리세이드만큼 크다. 1984년 삼성의 키를 잡았던 이 회장과 4차 산업혁명의 문턱을 넘은 2020년 이 부회장의 시대 사이에는 한 세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차이가 흐른다.

소니나 애플이 닦아놓은 아스팔트를 남보다 더 빨리 질주하는 것이 성공이었던 시절 마이바흐처럼 세련되고 발빠른 리더십이 경쟁력이었다면 글로벌 시장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야 하는 이재용 시대 삼성의 성공방정식은 오프로드를 마다하지 않는 팰리세이드 리더십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그 첫 걸음에서 핵심은 경청과 열린 사고의 리더십임도 간과할 수 없다.

이 회장은 2014년 마지막 신년사에서 "다시 바꿔야 한다"고 했다. 이병철 선대 회장은 "뼈를 깎는 노력과 창조력, 천신만고의 고난을 무릅쓰는 강한 정신력과 용기가 있어야 비로소 기업 경영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 부회장은 3년 전 항소심 결심공판 최후진술에서 "이병철의 손자나 이건희의 아들이 아닌, 선대 못지 않은 기업인으로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다.

누구든 역사를 쓰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틀을 깨뜨려야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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