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악마로부터 우릴 지켜주는 구세주"

머니투데이 뉴욕=이상배 특파원 | 2020.09.17 03:38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 미국에서 운전하다 보면 'CNN 가짜뉴스(Fake News)'란 스티커를 붙인 차량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차량들은 으레 '트럼프 2020' 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는 스티커도 함께 붙이고 다닌다. CNN과 뉴욕타임즈 등 진보적 주류언론들에 대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불신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심지어 이들 가운데 일부는 코로나19(COVID-19) 사태도 실제보다 부풀려졌다고 생각한다. 언론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헐뜯기 위해 일반 독감 수준의 바이러스를 놓고 과도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는 주장이다. 이들이 마스크 착용 의무화를 거부하고 전면적 수업재개를 요구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최근 미국에선 이 같은 음모론이 소셜미디어를 타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그 중심에 극우 음모론자 집단 '큐아넌'(QAnon)이 있다.

# 2016년 12월4일 미국 워싱턴D.C.의 피자 전문점 '카밋 핑퐁'. 노스캐롤라이나주 출신의 28세 백인 남성 에드가 웰치가 난데없이 들이닥쳐 반자동 소총을 난사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고, 범인은 제 발로 걸어나와 경찰에 체포됐다.

범행 동기를 묻자 "피자 가게 지하실에 갇힌 아동 성노예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해 11월 대선 직전 트위터를 타고 퍼진 이른바 '피자게이트' 의혹을 사실로 믿었다는 얘기다.

피자게이트는 힐러리 클린턴 당시 대선후보 등 민주당 정치인들과 경제·연예계 거물들로 이뤄진 소위 '딥스테이트'(비밀 권력집단)가 이 피자 가게의 비밀 지하실에서 아이들을 성착취하고 있다는 큐아넌의 음모론이다.

하지만 이 피자 가게에 비밀 지하실은 없었다. 그럼에도 약 4년이 지난 지금 '피자게이트'가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다시 확산되고 있다.

큐아넌들은 지난 5월말 캐나다 출신의 팝스타 저스틴 비버가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한 행동이 '피자게이트'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당시 비버는 "피자게이트의 피해자가 맞다면 모자를 손으로 만져달라"는 팬의 요청을 받은 뒤 모자를 손으로 만졌다. 비버의 실제 의도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후 구글에선 피자게이트에 대한 검색량이 폭증했다. 틱톡에서도 피자게이트란 해시태그를 단 동영상이 수천만건 쏟아졌다.

# 큐아넌의 '큐'(Q)는 의문(Question) 또는 미국 에너지부의 최고 기밀등급을 뜻한다. '아넌'(Anon)은 익명을 의미하는 '어나니머스'(Anonymous)에서 따왔다. 약 4년 전 온라인 익명 게시판 '포챈'(4Chan)에 올라온 공화당 지지자들의 '반(反) 엘리트주의' 루머들을 이용자들이 소셜미디어에 퍼다 나르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버락 오바마,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톰 행크스 등이 아동을 성착취할 뿐 아니라 악마를 숭배하고 인신 공양과 식인까지 일삼는다고 믿는다. 이런 황당한 주장을 누가 믿겠나 싶겠지만 그 추종자의 수가 만만치 않다.


미국 지상파 NBC에 따르면 페이스북에서 큐아넌을 지지하는 이용자는 수백만 명에 달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큐아넌 커뮤니티의 회원 수가 현재 약 4만명으로 지난 3월 대비 6배 급증했다고 전했다.

올해 큐아넌의 빠른 확산은 코로나19 사태와 무관치 않다. 지난 3월 이후 전국적 봉쇄령으로 집에서 갇혀 지내는 동안 큐아넌의 숙주인 소셜미디어에 대한 노출도가 높아진 이들이 적지 않다. 다른 사람을 만나기 어려우니 '현실성 검증'(reality check)의 기회는 줄어들고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팬데믹의 또 다른 병폐다.

# 큐아넌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악마적 딥스테이트를 척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웅' 또는 '구세주'라고 믿는다. 재선이 급한 트럼프 대통령도 큐아넌을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며 음모론자들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이러니 "딥스테이트의 비호세력"인 주류언론이 트럼프 대통령에 불리한 사실을 보도해도 큐아넌들은 '가짜뉴스'라고 치부하고 좀체 흔들리지 않는다. 가짜뉴스가 진짜뉴스가 되고, 진짜뉴스는 가짜뉴스가 된다.

큐아넌은 이미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지난 8월 미국 조지아주에선 큐아넌의 추종자인 마조리 테일러 그린이 공화당 하원의원 후보로 선출됐다. 미 언론들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 '티파티'처럼 큐아넌이 공화당의 주류세력 가운데 하나로 부상할 가능성까지 제기한다.

과학을 외면하고 팩트를 거부하는 극우 큐아넌이 만약 미국 정치의 주류에 편입된다면? 그래서 이들을 등에 업은 제2, 제3의 트럼프까지 나온다면 미국, 그리고 한반도를 포함한 전 세계는 어떻게 될까. 어쩌면 트럼프는 시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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