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외로워야 찾아갈 사람이 보인다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 2020.07.11 07:00

<212> 이강산 시인 ‘하모니카를 찾아서’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이강산(1959~ ) 시인의 네 번째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는 길 위나 낡은 여인숙,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시장에서 “역병의 속병”(‘풍탁風鐸’)을 오래 앓으며 건져 올려 흑백 사진 같다. 거친 듯 정겨운 풍경은 정지해 있는데도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사람들은 살아 움직인다. 시 한 편이 한 장의 사진이고, 시집은 영화 한 편이다. 비 내리는 흑백 영상이 촤르르 돌아가는 시네마 천국이다.

시인은 “사람의 말이 한마디도 닿지 않는 날이 늘어간다”(‘시인의 말’)고 했지만, 그의 시에선 “평생을 걸어서 이제야 닿은 듯 유모차를 끌고 가는 노파”(‘심연’)나 민박집 여주인, “신발 난전에서 휠체어를 탄 여자”(‘무조건 자유’)와 같이 소외된 이들의 삶이 시간 속에서 걸어 나온다. 사람에 대한 애착 없이는 쓸 수 없는 시인지라 읽다 보면 가슴이 절로 따스해진다.

노원구 중계본동 산 104-1번지 언덕길의 절정,

평생을 걸어서 이제야 닿은 듯 유모차를 끌고 가는 노파가 막 가라앉고 있다

저 바닥에 이르려면 나는 아직 멀었다

- ‘심연’ 전문


이제 집에 걸어둘 만한 사진을 찍어도 되는가 철거 다큐 따위는 내던져도 되는가, 나는

이제 깃발을 내려도 되는가 눈비에 쭈그려 앉은 광장을 그만 떠나도 되는가, 나는

이제 장돌뱅이 아버지는 지워도 되는가 계급의 지평선, 장터는 잊어도 되는가, 나는

이제 관념으로 기울어져도 되는가 연두에 눈먼 열여섯의 눈을 다시 떠도 되는가, 나는

- ‘연두’ 전문

시인은 오래 사진을 찍었다. 그것도 흑백 사진을. 스스로 ‘휴먼다큐’라 명명하고 전시회와 사진집도 냈다. 그가 찍는 대상은 도시 철거민이나 광장을 지킨 사람들, 아버지·어머니처럼 삶의 굴곡이 얼굴에 드러난 우리네 이웃이다. 사람을 찍는 일은 순간에 이루어질 수 없다. 먼저 그들과 가까워져야 비로소 원하는 사진을 얻을 수 있는, 지난한 작업이다.

“노원구 중계본동 산 104-1번지”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는 백사마을이다. “언덕길의 절정”을 한 노파가 “유모차를 끌고” 올라간다. 시인은 노인이나 어르신이라 하지 않고 노파, 즉 늙은 여자라 칭한다. 시인은 “삐끼 노파”(‘이하 장미여인숙’)나 “노파 곁을 지나는 여자”와 같이 상황이나 호칭에 대해 포장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아마 사실에 대한 기록을 중시하는 다큐 사진을 찍으면서 몸에 밴 습관이 시에 그대로 묻어 난 때문일 것이다.

“언덕길의 절정”은 얼마 남지 않은 노파의 삶이다. 인생은 내리막이 없고 오르막만 있는 고달픈 것이라는 인식이 묻어난다. 유모차에 겨우 의지해 “이제야 닿은 듯” 하더니, “노파가 막 가라앉고 있다”. 절정은 어느새 바닥으로 변주된다. 아니 어쩌면 절정과 바닥은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평생 밀고 올라온 “저 바닥에 이르려면 나는 아직 멀었다”는 깨달음이 결국 심연이다.

환갑이 지난 시인은 이제 현장을 떠나 “관념으로 기울어” 지려 한다. “이쯤에서 유랑을 접고 숙면”(‘멍게의 방’)에 들려 한다. “연두에 눈먼 열여섯”의 호기심 가득한 나이로 돌아가 “눈을 다시” 뜨고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 눈총을 받으며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중년 남자가 하모니카를 분다
바람맞은 왼팔은 숨겨 두고 오른팔만으로 아슬아슬 분다

아침마다 하모니카 소리와 대치하던 나는
어느 틈엔지 양팔, 두 손으로 마술처럼 부는 선배의 하모니카를 다 잊었다

봄여름가을겨울 안개와 모닥불, 구름과 바람의 고층 아파트가 되어버린 지하 주차장
시시때때 감꽃이 피고 나비가 날았다
별들이 북적거렸다

어쩌다 하모니카가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미적미적, 남자의 왼팔을 옆자리에 싣고 하루종일 지상의 하모니카를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잊고 지냈던 자신의 하모니카를 발견하기도 하고

녹슨 침을 탁, 탁 털어 불러보기도 하는데
그러면 가슴의 지하 주차장에서 불현듯 경적이 울리기도 하는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남자가 있거나 없거나 자신의 하모니카를 찾아서 지상으로 떠나는 것이다
왼팔이 무사한지 은근슬쩍 만져보는 것이다

- ‘하모니카를 찾아서’ 전문

아침마다 왼팔이 없는 중년 남자가 고층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하모니카를 분다. “사람들 눈총을 받으”면서도 “오른팔만으로 아슬아슬 분다”. 중년 남자에 대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아마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그 자리에 살던 사람일 것 같다. 그렇게 산동네 비탈진 판잣집에서 하모니카를 불었을 것이다.

시끄럽다고 항의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하모니카 소리에 빠져든다. 시인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두 손으로 마술처럼 부는 선배의 하모니카”다. 중년 남자는 비가 와도, 자욱이 안개가 껴도 그 자리에서 하모니카를 불었다. 하모니카 선율에서 “감꽃이 피고 나비가 날”고 “별들이 북적거”린다. 이에 동화된 사람들은 중년 사내가 보이지 않은 날이면,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종일 허전하다.

시인은 지하라는 공간에 주목한다. 하모니카를 부는 중년 남자의 삶은 지하, 즉 바닥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아침마다 지하 주차장에서 하모니카를 분 중년 남자가 지상으로 향하면, 그 자리엔 지상에 사는 사람들이 머문다. 사람들은 “문득 잊고 지냈던 자신의 하모니카를 발견”한다. 그러면 가슴에서 “불현듯 경적이 울”린다. 왼팔이 없는 중년 사내의 하모니카 소리는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시인이 찍은 다큐 사진이나 시가 하모니카의 자리에 들어가도 무방하다.

꼭 한 사람 찾아가야겠다

웅크리고 앉아 바다를 뒤집어쓴 섬이 컥컥, 숨넘어가는 소리로 뒤척여 바다를 잡아당기다 잠을 깼다

섬 홀로 두고 온 날은 꿈도 섬처럼 아득하다
닻을 내릴 틈도 없이 사라진다

팽나무 아래서 슬그머니 바다를 찔러보던 나처럼 지금쯤 섬도 선착장에 앉아 밀물을 집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다고 배가 달려오는 게 아니다
섬도 안다

외로워야 먼 길이 가까워진다
찾아갈 사람이 보인다

늦기 전, 첫 배를 타야겠다

- ‘첫 배를 타야겠다’ 전문

오래 사진을 찍다 보니 수술할 만큼 어깨도 안 좋고, 속병도 심한 시인은 “맵고 짠 욕망과 인연은 그만 끓이겠다”(이하 ‘시간을 굽다’)고 결심한다. 그래도 “꼭 한 사람”은 첫배를 타고 찾아가 봐야겠단다. 섬 “선착장에 앉아 밀물을 집적거리고 있을” 그가 누구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먼 길을 찾아 나설 만큼 그는 외로운 사람이다.

시인은 “늦기 전, 첫 배”를 탄다. “길 떠나면 어디든 섬이 되고/ 어디서든 내가 피고 진다”(‘시인의 말’). 하모니카를 부는 중년 남자를 통해 나를 발견하듯, 첫 배를 타고 찾아가 만나려는 사람도 결국 ‘나’일 것이다. “오늘까지 내게 정박하고도 나를 찾지 못한 것처럼// 이 섬에서 내가 찍지 못한 사진 한 점”(‘섬’ 전문). 즉 외로운 섬을 통해 나를 찾는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그의 시에선 바람이 분다.

◇하모니카를 찾아서=이강산 지음/천년의시작 펴냄/120쪽/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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