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넬 비상계단엔 불, 대피로 앞엔 벽돌…끔찍했던 '그 날'

머니투데이 김남이 기자 | 2020.06.16 04:40
4월 29일 오후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물류창고 공사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소방대원들이 진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사진=뉴스1

"불이야!"

지난 4월 29일 경기 이천시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 공사 현장에서 A씨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불은 불꽃이 보이지 않는 '무염연소' 상태로 이미 건물을 휘감은 뒤였다. 지하 2층에서 불꽃을 발견된 후 1~2분 만에 지하 2층 작업장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근로자들은 화염 속에서 살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본래 대피로 역할을 해야 할 방화문 설치공간이 벽돌로 막혀 있었다. 작업장에 이슬이 맺힌다며 통로를 막아둔 것이다. 4명의 근로자는 그곳을 지나가려다 세상을 떠났다.


평소의 2배 많은 작업자, 사고 규모 키워...용접 불티가 우레탄폼에 튄 것이 원인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물류창고 화재 현장에서 경기남부지방경찰청과 유관기관 관계자들이 3차 합동 감식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사고 당일 공사현장에는 평소보다 약 2배 많은 67명의 근로자가 일하고 있었다. 공사 기간을 줄이기 위해 많은 근로자를 투입해 동시에 여러 작업을 진행했다. 지하 2층부터 옥상(지상 4층)까지 근로자가 꽉 찼다.

무리한 일정을 맞추려다 보니 화재 위험이 있는 작업까지 함께 이뤄졌다. 화재에 매우 취약한 우레탄 폼에 발포 작업과 용접 작업이 동시에 진행된 것이다.

화재는 여기서 발생했다. 지하 2층에서 아침 8시부터 시작된 A씨의 산소용접 작업 중 불티가 천장의 마감재 속에 도포돼 있던 우레탄 폼에 튀었다. 문제는 초기에 불이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든 무염연소 상태로 천장과 벽을 타고 퍼진 것이다.

천장과 벽을 타고 사방으로 번진 불이 산소 공급이 원활한 각 구역의 출입문에 다다랐을 때야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목격자와 당시 주차돼 있던 차량의 블랙박스를 보면 오후 1시31분 불꽃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1분 뒤인 1시32분에는 지하 2층 작업장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조리실·엘리베이터 작업자 모두 사망…탈출구는 벽돌로 막혀있어


경기도 이천시 창전동 이천서희청소년문화센터에 마련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 합동분향소에서 엄수된 추도식에 참석한 유가족들이 슬픔에 잠긴 채 헌화를 하고 있다./사진=뉴스1
비상 경보장치(싸이렌 등)가 없어 작업자들은 화재 발생 사실을 조기에 알지 못했다. 비상유도등, 간이 피난 유도선 등 임시 소방시설도 없었다. 화재감시인조차 작업 현장에 없었다.

이미 작업자들이 불을 발견한 순간은 늦은 셈이다. 불길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순식간에 번졌다. 설계와 다르게 철제가 아닌 판넬로 마감한 옥외 비상계단은 대피로의 역할을 해야했지만 사고 현장에선 화염과 연기가 퍼지는 통로가 됐다.


또 엘리베이터 통로 3개와 계단 4곳도 화염과 연기의 통로가 돼 탈출구가 막혔다. 창고 현장은 우레탄 폼이 천장과 벽체 대부분에 발라져 있어 화재가 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상 2층의 조리실 내부에서 주방 덕트와 소방배관 작업을 하던 12명은 화재 사실을 늦게 알았고, 모두 사망했다. 또 당겨진 공사 일정을 위해 전날부터 엘리베이터 작업을 하던 3명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특히 화재가 시작된 지하 2층에서는 근로자 4명이 방화문 공간을 통해 화재를 피하려고 했지만 뚫려있어야 할 공간이 벽돌로 막혀 있었다. 결로를 막기위헤 폐쇄한 것이었다. 인허가 관청에 제출한 유해위험방지 계획서와 완전히 다른 부분이다.



경찰, 24명 입건·9명 구속..."공기단축 관련 중요 책임자 집중 수사할 것"


15일 오전 경기도 이천경찰서에서 반기수 수사본부장이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 신축공사 현장 화재 사건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스1


이천 물류센터 화재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모두 38명. 12명이 부상(중상 4명, 경상 8명)을 입었다. 피할 수 있는 인재(人災)라는 점에서 더 안타까운 부분이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공사 관계자들이 △피난대피로와 방화문 폐쇄 △불법 재하도급 △임의시공 △화재 및 폭발 위험작업의 동시시공 △임시소방시설 미설치 △안전관리자 미배치 △화재예방 및 피난교육 미실시 등 다수의 안전수칙 미준수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우선적으로 화재 발생의 원인과 인명피해에 책임이 있는 공사관계자 24명(발주자 5명, 시공사 9명, 감리단 6명, 협력업체 4명)을 업무상과실치사상 등 혐의로 입건했다. 그 중 책임이 중한 9명은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 관계자는 "화재 발생과 피해 확산의 근본적 원인이 되었던 공기단축과 관련한 중요 책임자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수사하겠다"며 "또 공사과정에서의 불법행위와 여죄 등도 계속 수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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