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 LA폭동과 어떻게 다를까?

머니투데이 뉴스1 제공  | 2020.06.03 17:50

LA폭동은 LA 지역에 한정 vs 플로이드 시위는 미국 전역
LA폭동은 흑인 폭동 vs 플로이드 시위는 '다인종' 시위

2일(현지시간) 워싱턴 링컨 기념관 계단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대와 경찰들이 대치를 하고 있다.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서울=뉴스1) 최종일 기자 = 미국 중북부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의 가혹행위로 비무장 흑인인 조지 플로이드가 숨지면서 촉발된 시위가 2일(현지시간)까지 미 전역에서 8일째 이어지면서 28년 전 LA 폭동이 재조명되고 있다.

LA 폭동은 6일간 지속됐고, LA 지역에 한정됐지만 이번 시위는 2일 현재 8일째 지속되고 있으며, 미국 전역에서 펼쳐지고 있다.

LA 폭동으로 인한 사망자는 63명, 체포된 인원은 1만2000명인데 비해 이번 시위는 2일 현재 9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약 5600명이 체포됐다.

또 LA 폭동은 흑인 폭동이었지만 이번 시위는 모든 인종이 참여한 다인종 시위라고 할 수 있다.

◇ LA폭동, 흑인 집단폭행 경찰들 무죄판결이 시발 = LA폭동은 교통신호를 어긴 흑인 로드니 킹을 집단폭행한 4명의 백인 경찰관이 1992년 4월29일 무죄 판결을 받은 데 대해 흑인들이 격분해 난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당시 LA경찰이 무차별 구타를 자행하는 장면을 녹화한 영상이 공개돼 대형 사건으로 비화됐다.

판결에 분노한 LA 거주 흑인들은 당일,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시위는 곧바로 폭동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위 시작 불과 몇시간만에 LA 전역에서 폭도들이 창문을 부수고 상점을 약탈했다. 심지어 일부는 LA 다운타운에 있는 경찰본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날 밤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주방위군 투입을 명령했다. 그런데도 소요 사태는 다음날에도 누그러질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아 주민들은 식량과 가스를 얻기 위해 긴 줄을 서야 했고 우편서비스와 학교, 스포츠 경기도 중단됐다.

1992년 4.29 폭동 당시 한인타운 <LA총영사관 제공> © 뉴스1

폭동 3일째인 5월 1일, 조지 HW 부시 당시 대통령은 폭도의 "무의미한 죽음"과 이를 부추긴 경찰의 잔혹성을 모두 비난하면서 수천명의 군병력을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5월 2일, 6000명의 주방위군에 4000명의 육군 병력이 추가 투입되면서 혼란은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이틀 뒤 시 당국은 통행금지를 해제했고, 시민들은 차츰 일상을 찾아갔다. 연방군은 5월 9일 철수했다.

6일 간의 폭동으로 곳곳에서 방화와 약탈, 총격전이 이어졌고 사상자가 속출했다. 63명이 숨졌고, 2000여명이 부상했으며, 1만2000여명이 체포됐다. 약 3000개의 건물이 불에 타거나 파괴돼 약 10억달러의 손해가 발생했다.

◇ 이번 시위로 미 전역에서 5600명 체포 = 플로이드 항의 시위는 플로이드가 지난달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관 데릭 쇼빈의 무릎에 8분 넘게 목이 눌려 숨진 뒤 하루 뒤에 미니애폴리스와 세인트폴에서 시작돼 미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데릭 쇼빈 - 유튜브 화면 갈무리

지난달 30일 최소 13개 시가 야간 통행금지령을 내렸고, 6월 2일에는 24개주와 워싱턴D.C가 주 방위군 투입을 요청해 1만7000명 이상이 현장에 투입됐다. 6월 2일 오전 기준으로, 미 전역에서 이번 사태와 관련돼 5600명 이상이 체포됐고, 9명이 숨졌다.

경찰의 가혹행위가 담긴 플로이드의 동영상이 페이스북을 통해 공유된 것이 시위 확산으로 이어졌다. 한 행인이 찍은 이 영상에서 플로이드는 숨을 쉴 수 없다고 수차례 힘없는 목소리로 애원했고 행인들도 말렸지만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I can't breathe'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시위대. © AFP=뉴스1

◇ 이번 시위는 "다인종적, 다문화적, 다세대적" = 1992년 LA 폭동과 이번 시위는 흑인을 상대로 한 경찰의 잔인한 폭력에 항의하며 시작됐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이번 시위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시위대 구성에서도 차이가 있다.

조디 데이비드 아머 USC 법대 교수는 공영라디오(NPR)와 인터뷰에서 1992년 폭동과의 비교할 때, 시위 참가자들이 "다인종적, 다문화적, 심지어 다세대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흑인 사회에 속하지 않는 이들도 플로이드의 영상을 보면서 고통을 느낀 것 같다"며 "지금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흑인사회에 공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로드니 킹 사건은 당시에 "단발적 사건"으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지속적이고 만연한 패턴을 보게 됐다"면서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운동이 2014년부터 지속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 시위 참여자가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팻말을 들고 있다. © 로이터=뉴스1

또 미 전역에서 다양한 구성원의 참여는 미국 사회 전체 시스템에 대한 불만 표시도 담겨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UCLA 사회과학 학장인 다넬 헌트 교수는 NBC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더 이상 뭔가를 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거리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헌트 교수는 "사람들은 '흑인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다'는 일반화된 인식을 갖고 있다. 이 같은 인식이 높은 실업률과 제한된 의료서비스, 감염병 대유행이란 현재의 분위기와 맞물려 모든 사회적 불안이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덧붙였다.

◇ 로드니 킹 사건은 한인 사회 표적 = 결국 이번 시위는 LA폭동과 비교할 수 없을 규모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LA폭동이 우리 기억 속에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한인 이민사 중 가장 불행한 사건으로도 기록됐기 때문이다.

로드니 킹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인 1991년 3월 흑인 빈민지역인 남부 LA의 상점에서 한인 주인이 흑인 소녀를 절도범으로 오인, 총격을 가해 사망하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폭동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언론은 이 사건을 집중 보도했고 이로 인해 한인들은 흑인들의 공격 대상이 됐다. 한인 사회는 약 2300개 업소가 피해를 입는 등 3억8000만 달러 규모의 재산피해를 입었었다.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베스트 클릭

  1. 1 '외동딸 또래' 금나나와 결혼한 30살 연상 재벌은?
  2. 2 '눈물의 여왕' 김지원 첫 팬미팅, 400명 규모?…"주제 파악 좀"
  3. 3 의정부 하수관서 발견된 '알몸 시신'…응급실서 실종된 남성이었다
  4. 4 "나이키·아디다스 말고…" 펀러닝족 늘자 매출 대박 난 브랜드
  5. 5 BTS 키운 방시혁, 결국 '게임'에 손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