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LG그룹이 반도체사업을 하지 않는 이유

머니투데이 원종태 산업1부장 | 2020.05.12 06:00
1.
1999년 1월6일. 구본무 회장은 여의도 트윈타워 동관 30층 회장실에 혼자 앉았다. 방금 막 청와대에 다녀온 터였다. 김대중 대통령과 30분간 면담했다. 다름 아닌 '반도체 빅딜' 때문이었다.

비서는 청와대를 다녀온 구 회장 낯빛이 유난히 어두워진 것을 보고, 뭔가 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날 구 회장은 시내 한 음식점에서 LG그룹 원로들과 셀 수 없이 술잔을 비웠다. 구 회장은 이 자리에서 "이제 모든 것을 다 버렸다"는 말까지 서슴치 않았다. 'LG반도체가 어떤 회사인데, LG반도체가 어떤 회사인데...' 구 회장의 속은 타들어갔다.

2.
구 회장은 정확히 1주일 전인 1998년 12월30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과 저녁식사를 했다. 이 위원장이 구 회장의 속내를 듣기 위해 일부러 만든 자리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IMF 조기졸업을 위해 대기업들이 주력 사업에만 집중해 국제 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며 그 유명한 '5대 그룹 빅딜'을 강력히 추진할 때다. DJ는 이 빅딜이 성공하려면 LG반도체와 현대전자를 통합해 글로벌 반도체 기업으로 키워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구 회장 생각은 180도 달랐다. LG그룹의 미래 먹거리인 반도체 사업을 내놓으면 LG 미래도 없다고 믿었다. 반도체 경기가 호황이던 1995년 LG반도체는 9000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당시 대우증권이나 장기신용은행의 시가총액과 맞먹는 금액을 단 1년동안 벌어들였다. 이런 회사를 대체 왜 내놓으란 말인가?

그러나 DJ 입장은 완고했다. 1998년 6월16일 국무회의에서 DJ는 "대기업 한 곳이 거부해 5대 그룹 빅딜이 안되고 있다"며 LG그룹을 대놓고 압박했다.

3.

플라자호텔 일식집에서 구 회장을 만난 이 위원장은 자꾸 구 회장에게 잔을 건넸다. 몇 순배 잔이 돈 후에야 이 위원장이 입을 뗐다. "회장님. 게임을 크게 하세요. 크게 놓고 보시면 얻으실 겁니다".

구 회장은 이 위원장에게 "무슨 뜻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 위원장은 LG그룹이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매각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 위원장은 "연초에 윗분을 한번 만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윗분은 바로 DJ였다.

구 회장은 결국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도체 사업을 포기할 때 포기하더라도 DJ의 진심을 직접 듣고 싶었다. DJ가 정말 그걸 원하는 지 확인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1999년 1월 6일 오후 4시30분. 구 회장은 청와대에서 DJ를 만났다. 구 회장은 DJ에게 "반도체는 선친이 물려주신 사업입니다. 기술력과 재무구조도 우수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DJ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표정도 싹 굳어졌다. 구 회장은 DJ의 속마음을 확실히 알아챘다. 구 회장은 다시 무겁게 입을 뗐다. "아쉽지만 국가경제를 위해 LG반도체를 내놓겠습니다. 이왕 포기하는 것 지분 100%를 모두 현대전자에 넘기겠습니다" 구 회장과 LG그룹은 그렇게 반도체와 멀어졌다.

4.
LG그룹이 포기한 LG반도체는 이후 현대전자에 인수됐고, '하이닉스'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승자의 저주 때문인지, 반도체 가격 하락 때문인지, 시장에 함부로 개입한 정권 때문인지, 하이닉스 경영은 이후 순탄치 않았다. LG반도체를 인수한 후 하이닉스는 계속 실적이 나빠져 대대적인 사업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했다.

급기야 LCD 사업부는 중국 BOE에 매각하고, 핸드폰 사업부는 팬택에 팔았다. 2012년에는 SK그룹이 하이닉스를 아예 인수해 사명까지 SK하이닉스로 바뀌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SK하이닉스는 코로나19 위기에도 불구, 올해 1분기 영업이익으로 8003억원을 벌었다.

구본무 회장의 타계 2주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구수한 사투리와 소탈한 모습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늘 편하게 대해주던 그가 살아있다면 이 위기의 시대에 어떤 해법을 내놓았을까? 곤지암 화담숲의 철쭉은 말없이 붉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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