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세상을 지켜낸 힘은 저 묵묵한 마중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 2020.05.02 07:00

<207> 우남정 시인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우남정(1953~ ) 시인의 첫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는 일상이 어떻게 시로 다시 태어나는지를 철학적 사유를 통해 보여준다. 시인은 관찰 혹은 일상에서 겪은(본) 것들에 경험과 상상, 사유라는 숙성을 거쳐 한 편의 시, 나아가 한 권의 시집으로 맛깔스럽게 빚어 내놓는다.

남보다 많이 늦은 나이에 등단한 시인은 일상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확대하거나 축소한다. 확대했을 때는 “접힌 표정이 펴지는 사이, 실금”(‘돋보기의 공식’)과 주름이 보이고, 축소했을 때는 문 안의 문이나 흑백사진으로 인화해 들이민다. 이 둘은 “내게 왔던 것들은 그렇게 멀어져 갔다”(‘줌zoom’)는 상실감과 흘러간 세월에 대한 회한과 상처가 슬쩍 묻어난다.

“누군가의 체온 같은 것이 기억을 뒤흔”(이하 ‘꽃을 긁다’)들긴 하지만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진 않는다. 시인은 “어디서 스친 적이 있나”(‘줌’)와 같은 인연, 자동차 밑에서 잠든 길양이들을 깨우는 생명존중(‘모닝 톡톡’), “사람들은 매일 집으로 가는 지도를 찾아 헤”(‘재활병원’)매는 존재론적 질문, “나는 기꺼이 죽음을 즐기기로 한다”(‘MRI’)와 같은 삶의 지혜와 초연함을 시집 곳곳에 펼쳐놓는다.

일생에 딱 한번 꽃을 피운다

한 저녁이 또 그 가시 잎에 맺혀 있다

사막에서 잎을 틔우는 일은
살아낸 밑동부터 한 잎 한 잎 버리는 것이다
버린 한 잎의 제 살을 발라먹고
버린 한 잎의 제 결로, 제 눈물을 핥아먹고

그 눈물만큼 깊어가는 갈증으로

지구 저편으로 걸어간다

- ‘용설란’ 전문

이러한 특성이 잘 드러난 시가 ‘용설란’이다. 용설란은 사막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100년을 사는 동안 딱 한 번 꽃을 피운다고 한다. 평생을 꽃 한 번 피우기 위해 산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일단 꽃을 피우면 모든 영양분을 꽃과 씨앗에 쏟아붓고 죽는다. 시인이 여생을 시를 위해 살겠다는 다짐과 다르지 않다.

생(生)의 시계를 저녁에 맞춘 시인에게 인생이란 “사막에서 잎을 틔우는 일”이다. 생존을 위해 나를 버리고, 발라먹고, “눈물을 핥아먹는”다. 잎을 틔우자마자 “밑동부터 한 잎 한 잎 버리는 것”은 꽃과 씨앗을 위한 자기희생이다. 나를 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숭고한 사랑을 “눈물만큼 깊어가는 갈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딱 한번”이나 “한 저녁”, “한 잎”과 같은 표현이다. 사막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대(代)를 잇는 것이 숭고하긴 하지만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인간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지만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할 순 없다. 죽음 또한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이다. 하여 뚜벅뚜벅 “지구 저편으로 걸어”가는 시인의 모습은 경건하다.

문 속에 문
뚜껑을 비틀거나 잡아당겨야 열리는

내 몸에는 문이 몇 개나 될까
나를 작동시키는 문을 바라본다

비밀을 간직한 창
잊어버린 비밀이 잊어버린 비밀을 기억해내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

비밀은 안녕한가
나는 어떤 번호로 해제되어야 속살을 보일까
이 문을 열고 저 문을 닫는 순례들

빈방의 얼굴이 창백하다
비밀이 너를 만진다

너의 표정은 언제나 굳게 잠겨 있다

- ‘마트료시카’ 전문


마트료시카는 한 개의 인형 속에 작은 인형 몇 개가 겹겹이 들어가 있는 러시아 목각 인형이다. 같은 모양이지만 크기가 다른, 점점 작아지는 인형을 통해 ‘나라는 존재’를 확인한다. 아니 나와 너의 관계, 그 쓸쓸함의 현재를 마주한다. 나는 몇 개의 문을 통과하고, 비밀번호를 알아야만 열린다.

하지만 “이 문을 열고 저 문을 닫는 순례들”로 인해 우리 관계는 틀어진다. 내 문을 열어야 할 너는 다른 문을 연다. 나를 만져야 할 “비밀이 너를 만”짐으로써 우리 사이는 “이쪽과 저쪽”만큼 벌어진다. 더 이상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비밀은 안녕한가”, 즉 우리의 관계는 안녕한가 묻고 있지만 “어떤 번호로도 해제”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마음의 문을 “굳게 잠”근다. 회복 불능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시인의 말’)

무엇에 걸려 뒤집히는 비명, 눈물이 쑥 빠진다
뽑히다 만 뿌리
살갗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다
온종일 발품을 팔다 지쳐 돌아온 날
피멍 삼킨 그 발톱이다

가만, 그 밑에 보드라운 무엇이 있다
고물고물 숨죽인
보얗고 여린 꽃잎 한 장
반달 같은 발톱에 새순이 돋았나
들뜬 보굿을 밀어올리고 있다

할머니가 들려주신 옛이야기
한겨울 개울가
곰 한 마리 발견한 사냥꾼, 활을 쏘았대
곰이 그대로 서 있더래
다시 활을 쐈는데 그대로 서 있더래
가까이 가보니
어미 곰은 커다란 바위를 껴안고 죽어 있었더래
그 밑에 새끼 두 마리 곰실곰실 먹이를 찾고 있었대

죽어서도 덜컹거리며 기다리고 있었구나
눈을 질끈 감고 죽은 발톱을 뽑아낸다
자줏빛 등이 품고 있던
어린것 아장아장 걸어 나온다

세상을 지켜낸 힘은 저 묵묵한 마중에 있었다

- ‘죽은 발톱’ 전문

시 ‘죽은 발톱’은 서사적 구조와 묘사가 빼어난 작품이다. “무언가에 걸려 뒤집”혀 죽은 발톱과 사냥꾼의 화살에 맞아 죽은 어미 곰, “피멍 삼킨 그 발톱” 밑에 새순처럼 돋아난 살과 죽은 어미 곰 밑에서 “먹이를 찾고 있”는 새끼 곰 두 마리를 대비시킨다. 죽어가면서도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모성애는 “세상을 지켜낸” 위대한 힘인 동시에 “묵묵한 마중”이다.

자기희생과 생명존중은 시 ‘꽃에 대한 예의’에서도 드러난다. 시들긴 했지만 “아직 향기가 남아 있는” 꽃잎과 “아직 푸른 잎이 매달린” 줄기 때문에 꽃을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아직 거기 생명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래 입은 브래지어와 속곳을 버릴 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럼에도 “얼룩진 속곳에 남아 있는/ 저 미열”. 즉 사람의 온기를 포착해내는 시인의 감성은 참으로 탁월하다.

“썩어버릴 동안/ 기다려줄 땅 한 평”은 사실 내가 묻힐 곳이다. “어디로 가나”는 나는 죽어서 어디로 갈까, 라는 종교적·철학적 질문이다. 일상에서 존재론적 사유로 나아가는, 우남정 시가 가진 미덕이다. “낡은 턴테이블에서/ 머뭇거림 같은 노래가 흘러”(‘시인의 말’)나오는 봄날, 그의 시집을 펼치면 “자줏빛 등을 품고” “어린것 아장아장 걸어 나오”는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리라.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우남정 지음. 문학의전당 펴냄. 124쪽/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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