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비난 안 받고 ‘복지’ 얘기할 수 있으려면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 2020.04.18 06:30

[따끈따끈 새책] ‘정치적 부족주의’…집단 본능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가

2012년 5월 1일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점령하라’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경제적 불평등 해소’을 위한 시위였는데, 참여자들은 부유한 백인에 고학력의 소유자였다. 빈자를 위한 운동에 부자가 참여한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 셈이다.

자신을 ‘세계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사실 USA를 연호하는 촌뜨기와 구분하는, 배타적 ‘부족적 표식’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운동에 참여한다.

미국의 다른 백인 부족은 교육 수준이 낮고 인종주의적이며 노동자 계급이다. 이들은 엘리트 계급을 저 멀리서 권력의 지렛대를 통제하는 소수 집단이라며 경멸한다. 이 경멸은 강력한 부족적 정체성을 형성하며 트럼프 당선에 크게 일조했다.

부족 본능은 소속 본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배제 본능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당선은 단순히 ‘좌우파의 대결’이나 ‘인종주의’만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노동자 계급 백인들이 정치적 관여도가 낮다는 성향 때문에 ‘개인주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강렬하게 ‘부족적’이다. 단지 엘리트 계층이 이들에게 ‘부족적 정체성’을 형성해 주는 집단들을 반사회적이고 불합리하다고 여기며 멸시했을 뿐이다.

그간 부족주의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방치한 결과, 미국 정치권의 좌우파도 새로운 정치 부족을 형성하고 있다. 좌파는 집단을 불문하고 표용한다는 기조에서 멀어져 날이 갈수록 인종, 민족, 젠더에 따라 집단 정체성은 더욱 세분화되고 있다.

가령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 라틴계 동성애자가 나오는 소설’을 읽기만 해도 억압에 일조한다며 비난받는다. 누가 특권을 가장 덜 가지고 있는지 겨루는 제로섬 경쟁을 하는 수준이다.

우파도 ‘백인 정체성 정치’에 매몰됐다. 이들은 백인이 갖고 있지도 않은 특권을 가졌다고 몰아붙이는 바람에 부족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부족주의를 간파하면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같은 거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불명예스러운 베트남 전쟁이나 이라크 침공으로 낙관했던 민주주의의 실패 같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부족이라는 집단에 소속되면 집단 정체성이 새로운 프레임을 씌어준다. 부족 외 사람에 대한 탈인간화가 그것. 타인에 대한 공감과 감수성이 마비될 뿐 아니라 자기 집단이 헌신하는 목표에 유리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만든다.


미국의 대안 우익 단체 ‘알트 라이트’는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나와 폭동을 일으키고, 한국의 ‘일베’는 수많은 반사회적 사건을 일으키며 10, 20대 남성을 잠식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선 모든 인종과 계급이 스스로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상당수 백인 미국인은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보다 백인에 대한 인종주의가 더 심하다’고 생각하고 미국의 다양성 정책은 ‘백인에 대한 공격’이라며 두려워한다.

하나의 부족이 압도적으로 지배적일 때는 박해할 수도 있지만, 때론 너그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엔 지배력을 안전하게 확보하지 못한 부족이 저마다 공격받는다고 느낀다.

저자는 “일자리나 기타 경제적 이득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자격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낀다”며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집단 간의 파괴적 경쟁으로, 완벽한 정치적 부족주의로 퇴락한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위해 상대 부족을 공격할 수밖에 없는 운명일까.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부족주의에서 벗어나 보편적 가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을까.

인종통합 연구자 고든 W. 올포트는 ‘편견의 속성’에서 상이한 집단 간에 ‘면대면’ 접촉이 있을 경우 편견을 깨뜨리고 공동의 토대를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60년간 이 기본적인 사실이 영국, 이탈리아, 스리랑카까지 전 세계에서 모든 형태의 집단 편견에 대해 반복적으로 증명됐다.

다른 부족들이 단순한 접촉을 넘어 개인과 개인이 대면해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 것이 대전제다.

저자는 “한 명 한 명이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때 ‘부족적 적대’의 발원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며 “그래야 ‘인종주의자’라고 비난받지 않으면서 대문화 가정에 대한 우려를 말할 수 있고, ‘빨갱이’라고 비난받지 않으면서 ‘복지’를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치적 부족주의=에이미 추아 지음. 김승진 옮김. 부키 펴냄. 352쪽/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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