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가수 조규찬은 “1분 전에 소식을 들었다”며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은 이날 문화재청이 그의 아버지 나화랑(본명 조광환, 1921~1983)의 경북 김천 생가를 국가문화재로 등록했기 때문이다. 대중음악 역사에서 작사가, 작곡가, 가수, 연주자 등 대중음악인의 생가가 국가등록문화재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기억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선명한 기억들이 몇 편 있어요. 거실에서 제가 그림을 그리면 아버지는 상을 펴놓고 총보(總譜, 성부별로 된 여러 악보)를 펜촉에 잉크 묻혀 쓰셨어요. 때론 거실에서 클래식 공부하는 학생들 레슨도 하셨죠.”
조규찬은 3남 2녀 중 넷째로 아들 중엔 막내였다. 결과적으로는 세 아들 중 가장 유명한 싱어송라이터가 됐지만, 아버지 생전엔 음악과 거리가 먼 ‘그림쟁이’였을 뿐이다.
그가 선화예고를 나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할 때까지만 해도 음악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1989년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무지개’란 곡으로 금상을 타면서 그는 출중한 뮤지션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의 ‘끼’는 아버지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한 번은 TV에서 애국가가 나오는데, 저도 모르게 그 선율에 화음을 넣고 있더래요. 그게 신기했는지, 어느 토요일 햇살 비추던 오후에 아버지가 저를 위해 동요 한 곡을 지어주셨어요. ‘산으로 강으로’라는 곡이었는데, 그 곡 멜로디를 가르쳐주고 반주해주셨던 기억이 선명해요. 아직도 그 가사와 멜로디를 또렷이 기억해요. 동요지만 동요 같지 않았던 멋있는 선율이었어요.”
나화랑은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동경의 중앙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1942년 귀국해 태평레코드에서 가수로 데뷔했다가 ‘고려성’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형 경환의 주선으로 이듬해 포리돌레코드사에 작곡가로 입사했고, 처녀작 ‘삼각산 손님’을 태성호가 불러 성공을 거뒀다.
KBS 경음악단지휘자로 활약하기도 한 그는 무엇보다 민요풍의 가요계를 다양한 대중음악의 산실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1955년 ‘늴리리 맘보’를 통해 라틴풍의 리듬을 도입해 가요의 외연을 확장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59년 첫 히트곡 ‘열아홉 순정’을 부른 이미자, ‘이정표’를 부른 남일해를 발굴한 것도 모두 나화랑의 솜씨였다. 1960, 70년대 인기가수들이 부른 그의 알려진 노래들만 500여 곡에 이른다.
“아버지가 생전에 ‘삼각산 작곡집’을 집에 가져왔는데, 제 기억으로는 한 1000곡정도 됐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당시 우리 가요의 주류 장르가 트로트여서 안 할 수 없었을 뿐이지, 제가 느낀 선친의 음악은 트로트 이상의 확장된 장르를 두루 다루셨어요. 그 흔적들은 대중음악인으로서의 기능으로 결정된 표현의 범주를 넘어선 것도 있고, 그걸 진보시키고 확장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들이 지금의 평가로 이어진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자식이 아닌 음악인으로서 아버지 음악에 대한 재해석을 묻자, 그는 “아버지의 음악적 의도를 헤아릴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선친의 음악을 이용해 내 삶의 영달이나 상업적 목적을 달성한다는 생각 자체가 우선 싫고요. 무엇보다 의도 자체를 실험하는 모험이 누를 끼친다는 생각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러워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혼자 작업실에서 ‘개인적인 녹음’은 해볼 생각이 있어요.”
국가등록문화재 제775호가 된 김천 나화랑 생가는 나화랑이 태어난 1921년 지어진 건물로 안채, 사랑채, 창고 등을 갖췄다. 문화재청은 당대 작곡가, 작사가, 가수 등 100여명을 조사한 뒤 생전 업적과 현재 생가 상태 등을 고려해 나화랑 생가를 문화재로 등록할 만한 가치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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