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힘들게 살지 마라” 둘째 출산 말리는 친정엄마

머니투데이 강상규 소장 | 2019.11.03 08:00

[i-로드]<72>현대 한국 사회에서 ‘1인4역’ 초슈퍼맘 요구받는 여성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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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현정 디자인기자
#“나처럼 힘들게 살지 마라”

전통적으로 한국 여성은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왔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아내와 엄마, 그리고 며느리 1인3역의 슈퍼맘이 돼야 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맞벌이가 늘면서 직장인 역할까지 추가돼 이젠 1인4역의 초슈퍼맘이 될 것을 요구받는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사는 여성들의 삶의 무게가 잘 그려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현대 한국 사회에서 결혼한 딸이 아이를 낳으려고 할 때 오히려 친정 엄마가 반대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아예 결혼을 말리는 친정 엄마도 있다. 딸을 힘들게 뒷바라지해서 대학 보내고 취직시켰더니, 결혼해서 시댁 눈치 보고 아이 낳고 집안일 하고 직장도 다니며 힘들게 고생하는 꼴을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친정 엄마의 심정은 자신이 겪어온 희생과 고생을 딸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필자의 지인 중에도 70대 초반의 A씨는 직장에 다니는 결혼한 딸이 둘째 아이를 가지려고 하자 “나처럼 힘들게 살지 마라”며 강력히 반대했다. A씨는 둘째 손주까지 돌봐줄 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이 아이 둘을 낳고 1인4역을 감당하며 고생스럽게 사는 게 싫다고 말했다. 결국 그 딸은 둘째 아이 낳는 걸 포기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저출산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자식 수가 지난해 기준으로 0.98명으로 1명도 안 된다. 전 세계에서 최저 수준의 출산율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82년생 김지영'과 A씨와 같은 생각을 가진 친정 엄마가 많은 이상 출산율 저하는 당연한 결과다.

#“일 때문에 출산을 포기한다”

현대 한국 여성에게 직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2017년 통계청 설문 조사에 따르면, 여성이 ‘항상 직업이 있어야 한다’거나 ‘출산 후에도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답한 비율이 70%가 넘었다. 젊은 층일수록 그 비율은 올라가 20대는 90%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여성은 여전히 일과 가정생활 중 양자택일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고, 결국 일가정 양립이 어렵다 보니 일 대신 출산을 포기하는 여성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달 28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머니투데이 후원 '2019 보건복지부-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OECD 공동 국제 인구 컨퍼런스'에서도 한국의 심각한 저출산 원인의 하나로 여성의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이 지적됐다. 토론자로 나선 보건복지부 한 여성 공무원은 한국에서 자녀 4명을 낳아 기르면서 직장을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지 토로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주인공 지영(정유미)은 결혼 전 직장을 다닐 때 존경하는 선배를 보면서 "결혼하고 아이 낳더라도 잘 해나갈 수 있어요. 팀장님처럼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영은 좋은 엄마이면서 직장에서도 인정받는 커리어 우먼이 되고 싶었지만, 현실은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기르는 경력단절녀가 되고 말았다.


실제로 보건사회연구원의 '2018년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복지 실태조사'에 따르면, 15~49세 한국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출산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한 질문에서 ‘일과 가정생활 균형의 어려움 때문’이라는 답변이 상당히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자녀가 반드시 있어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반드시 있어야 한다’라고 대답한 비율은 1991년 90%에서 2018년 50%로 대폭 줄었다. 이는 자녀를 낳는 것이 필수·의무가 아닌 선택이라는 인식이 과거보다 크게 늘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역대 정부가 저출산 대책으로 지난 10년간 150조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했음에도 출산율은 계속 하락했다. 수많은 출산장려 정책이 시행됐지만 효과가 전무했다. 이는 과거 대책이 출산율 제고에 초점을 둔(targeted) 대책이라기보다는 보편적 복지정책에 가까웠던 탓이다. 예컨대 '82년생 김지영'에게 일가정 양립이 고민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까지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박육아로) 하나 키우는 것도 너무 힘든데 둘째는 낳지 말자”

현대 한국 사회의 저출산 문제는 한 명만 낳아 생기는 문제다. 기혼 여성 중 처음엔 둘째를 낳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첫째를 낳아 기르다 보니 너무 힘들어서 결국 둘째를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필자의 직장 동료 중에서도 똑같은 이유로 둘째 아이 낳는 것을 포기한 사람이 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건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힘들지만 유독 현대 한국 사회에서 더 힘들어진 이유는 뭘까.

그 이유로 매티아스 돕케(Matthias Doepke) 미국 노스웨스턴대(Northwestern University) 경제학 교수와 파비안 킨더만(Fabian Kindermann) 독일 레겐스부르그대(Universitat Regensburg) 경제학 교수는 최근 발표한 ‘아기를 둘러싼 협상’(Bargaining over Babies)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여성의 ‘독박육아’ 문제를 지적했다. 논문의 저자는 출산율이 낮은 유럽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남성이 육아를 분담하는 비율이 낮고 여성이 육아를 전담하는 ‘독박육아’ 현상을 발견했다. 그리고 독박육아 현상이 존재하는 국가에서는 여성이 재출산을 거부할 확률이 높았다. 육아의 대부분을 한 쪽이 책임져야 한다면 해당 당사자는 출산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고, 이 경우 설령 정부가 육아보조금을 지급하더라도 출산율을 높이기 어렵다는 게 논문의 결론이다.

여성의 독박육아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으로 그랬고 또 현대 사회에서 육아를 도와주는 남성이 많이 늘었다고 해도 여성의 육아부담은 거의 그대로다. 예컨대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남편 대현(공유 역)이 "내가 아영이 목욕시켜 주려고 일찍 왔는데!"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남성의 육아 분담은 딱 이 정도까지다.

결론적으로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도 '82년생 김지영'이 1인4역을 감당하며 사는 게 힘들지 않고, 일과 가정생활 양립이 고민거리가 안 돼야 하고 또 독박육아가 없어야 하고 둘째·셋째 아이에 대한 지원이 강화되는 게 선행돼야 한다. 그래야만 결혼한 딸이 아이 낳는 걸 반대하는 친정 엄마가 감소하고, 일 때문에 출산을 포기하는 기혼 여성이 줄고, 독박육아 때문에 둘째 아이 출산을 포기하는 여성이 감소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들이 쉽게 충족될 수 있을까.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난 후 필자의 생각은 현대 한국 사회가 그렇게 빨리 변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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