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연구윤리와 자아실현의 욕구

머니투데이 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 | 2019.11.13 04:00
필자가 미국에서 교수로 지내는 동안 아이들도 현지 학교를 다녔다. 하루는 학교를 다녀온 딸아이가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무슨 책을 보는 지 궁금해 제목을 보니 ‘The Pirates of Plagiarism(표절해적)’이라는 책이었다. ‘저 어린 나이에 표절이 뭔지 알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외국에서는 신호등이 빨간불일 때 건너면 안 된다는 걸 배우는 시기부터 지식재산권, 연구윤리, 연구부정에 대한 교육이 시작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사진=국가과학기술연구회
연구윤리란 무엇일까? 연구윤리는 조작, 위조, 표절 같은 연구부정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연구부정이 법률적인 범주에 속한다면 연구윤리는 사회문화적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연구부정행위의 경우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 반면 연구윤리를 지키지 않았을 때는 연구계에서는 물론 사회적인 지탄을 받게 된다.

연구윤리의 시작은 400여 년 전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60년대에 프랑스와 영국에서 왕립과학아카데미를 만들었고, 이로써 개인의 영역에 있었던 연구가 국가 차원으로 확장된다. 이때 학회지라는 것이 처음 만들어졌고 연구자들이 학회지를 통해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연구윤리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당시에는 2종에 불과했던 학회지가 400년이 지난 지금은 30만 종이 넘게 발간되고 있고 학술대회도 세계 전역에서 열리고 있다. 그만큼 분야가 세분화되고 연구의 깊이도 깊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모든 학회지와 학술대회가 연구자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학회지들 속에서도 네이처, 사이언스와 같은 학회지가 ‘권위 있는’ 학회지로 인정받는 것은 세계적인 학자들의 피어리뷰(Peer Review)로 검증된 최첨단의 연구결과만이 발표되기 때문이다.

작년 7월 충격적인 소식이 뉴스로 보도됐다. 대학과 출연연에 소속된 일부 연구자들이 부실 학회에 참가했다는 내용이었다. 40년을 연구자로 살아오면서 남의 일이라 생각했던 일이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에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소식을 접한 바로 다음 날, 출연연 연구자의 부실학회 참가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최근 12년간의 자료에 대해 전수조사를 실시했다. 연구부정의 경우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시효가 있지만 연구윤리의 경우는 시효가 없기에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최근 12년에 대해 전수조사를 한 것이다. 결국 출연연에서 250명 정도의 연구자가 부실학회에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단호하고 엄중한 인사, 징계 조치를 결정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연구할 권리를 부여받은 출연연 연구자들은 연구윤리를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의 무게를 더 크게 느껴야 한다.


이 사태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연구자 본인에게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이를 미리 방지하지 못한 연구기관과 대학의 책임도 있으며, 과학기술계와 학계에서 자발적으로 책임을 느껴야 하는 부분도 있다.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것들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뒤따르고, 이를 지키는 문화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편한 이야기를 굳이 꺼내든 이유는 불편하다고 입을 닫는 순간 우리가 원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불편하더라도 지속적으로 고쳐나갈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고 자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독이 퍼져나가기 전에 완전히 걷어내는 것이 조직의 부패를 방지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과학기술을 비롯한 연구에 있어서 연구윤리는 연구결과에 대한 신뢰를 좌우한다. 연구윤리는 과학기술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연구윤리가 무너진다는 것은 연구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다. 인간의 동기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매슬로의 욕구 단계’가 잘 알려져 있다. 이 이론에서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인간 욕구의 최상위 단계로 본다. 연구자들이 학회 참여 횟수, 논문 발표 건수를 채우기 위한 연구활동이 아닌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최첨단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연구할 수 있는 문화와 환경이 필요하다. 선배 연구자로서 우리 출연연에, 과학기술계에, 연구계에 이런 문화와 환경이 마련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다시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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