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의견난립 vs 정치포용성'…연동형비례대표제, 뉴질랜드서 답을 구하다

머니투데이 웰링턴·오클랜드(뉴질랜드)=한지연 기자 | 2019.08.09 04:31

[the300][연동형비례제 글로벌 리포트]"다양한 배경의 연립정부 구성으로 협상 필수…좋은 답 찾는 과정일뿐"

뉴질랜드 웰링턴에 위치한 국회 의사당/사진=한지연기자
거대 양당을 중심으로 '거부의 정치'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 국회에서 '합의의 정치'를 필요로 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어색한 존재다. 소수당과의 연립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소수당에게 캐스팅 보트를 쥐어주고, 소위 거대 정당은 힘이 약해질 것이란 걱정이 피어오른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논의 테이블에 오르자 우려대로 소수당 위주의 찬성파와 거대 양당이 중심이 된 반대파가 뚜렷하게 갈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국민의 뜻'이 그렇다고 주장한다.

자유한국당은 비례제 확대로 소수정당이 난립하게 돼 양당 체제가 익숙한 정치구도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또 다른 거대정당인 민주당 역시 달가운 눈치는 아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장 자리를 맡고는 있지만, 선거제 개정 시 의석수가 줄어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거제 개정으로 의석 수가 늘어날 정의당 등 소수당은 정 반대의 논리를 펼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정당이 생겨나며 오히려 정치적 포용성이 늘어난다는 입장이다. 소수 정당이 표방하는 정책 역시 받아들여진다는 점 역시 이들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장하는 이유다.

모두가 입을 모아 자신의 뜻이 곧 '국민의 뜻'이라 주장하지만 정치적 유불리에서 자유롭긴 어렵다. 과도기를 거쳐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뿌리내린 뉴질랜드의 사례를 들여다봤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둘러싼 진짜 '국민의 뜻'은 무엇일까.

[검증대상]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으로 예상되는 장점(정치포용성 확대)과 단점(소수당의 난립)에 대한 검증.

[검증방법]
뉴질랜드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비례대표 국회의원과 선거관리위원회 협력위원 교수 등 전문가들의 분석 종합.

[검증내용]
◇"지역구 낙선이 정치인 능력 증명하는 것 아냐…비례대표 증가로 다양한 목소리 반영 가능해져"
국민당 소속의 4선 멜리사 리(한국명 이지연)의원. 2008년 한인 최초로 뉴질랜드 국회에 입성했다/사진=한지연기자


뉴질랜드의 선거제 개정은 대다수 국민들이 "내가 뽑은 국회의원들이 내가 원하는대로 하지 않는다"는 문제 의식을 느낀 것에서 시작됐다. 연동형 비례대표로의 개정 이전인 1970년대 치러진 선거에서 중도 좌파인 노동당의 표가 더 많았다. 그러나 중도 우파인 국민당이 집권하게 됐다. 이후 국민당이 경제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1980년대에 실시한 임금과 물가를 동결시키는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며 국민들의 선거제 개혁 의지는 더욱 커졌다.

뉴질랜드는 1993년 국민투표를 통해 선거제도를 기존의 소선거구제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꿨다. 이후 1996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기반으로 한 첫 선거를 치렀다. 2011년에 또 한번 연동형 비례대표 유지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해 유지 중이다. 현 52대 국회는 총 120명의 의원들 중 64명은 소선거구제 출신, 7명이 마오리족, 49명이 비례대표다.

뉴질랜드 최초 한인 출신의 국회의원인 멜리사 리(한국명 이지연)는 비례대표로만 4선에 성공했다. 국민당 소속의 리 의원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덕분에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2008년부터 의원직을 유지 중이다.

지난 5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만난 리 의원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이후 각 정당에서는 최대한 많은 유권자에게 어필하기 위해 다양성을 가진 후보들을 원했다"며 "여성, 동양인 등 다양한 인종, 다양한 나이대, 또 성적 소수자든 구분하지 않으니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국회에 진출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선거제 개정 후 1996년 처음 치러진 선거에서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은 전체 의회 구성 중 13%를 차지했지만, 2014년엔 22%까지 늘었다. 섬 나라 출신 이민자들을 뜻하는 태평양계는 3%(1996년)에서 2014년 6%로 아시안 역시 같은 기간 1%에서 4%로 급격히 늘었다.



리 의원은 뉴질랜드에서 약 12%를 차지하는 아시아인을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2013년 뉴질랜드가 의원 2/3에 달하는 강력한 지지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을 때도 리 의원은 반대표를 던졌다. 리 의원은 "나는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한국인과 아시아인을 대표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한인협회 미팅 결과 99%가 동성결혼에 반대한다고 해 그들의 뜻대로 반대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리 의원이 소신있는 의정 활동을 할 수 있는 배경에도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있다. 리 의원은 2017년 총선 당시 마운트 알버트 지역에 출마했지만 현 총리인 재신다 아던에 패했다. 그러나 지역구 선거에 출마하는 동시에 비례대표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뉴질랜드의 선거제 덕분에 꾸준히 의정활동 중이다.

일각에선 지역구 선거에서 떨어진 국회의원은 유권자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인데, 이들이 비례대표 자리로 국회에 입성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그러나 뉴질랜드 선거관리위원회 협력위원인 잭 바울스 빅토리아대 정치학 교수는 "좌석을 잃은 것이 곧 그들이 나쁜 국회의원이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그것은 비례대표제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하는 논쟁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바울스 교수는 "만약 각 후보자에게 지역구 출마와 비례대표 명부 등록 중 하나만을 선택하게 한다면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라며 "각 정당은 일 하고자 하는 후보자를 찾기가 더 어려워지고, 이 때문에 국회의원들의 자질 역시 오히려 하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협상은 의견 '난립'이 아니라 좋은 답 찾는 과정일 뿐…극우와 극좌 떠난 포용적 해법 도출돼"
잭 바울스 빅토리아대 정치학과 교수. 뉴질랜드 선거관리위원회 협력위원이기도 하다/사진=한지연기자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으로 거대 양당제는 무너졌다. 각 정당은 법안 처리에 필요한 과반 수 이상의 지지를 위해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밖에 없다. 내각 구성이 여당 일변도인 한국과 달리 뉴질랜드 부총리겸 외교부장관, 지역경제발전부·국방부·내무부·환경부 장관 등 요직도 소수당인 제1당과 녹색당이 함께 나눠 맡고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전인 1990년 선거를 보면 △국민당 47.8% △노동당 35.1% △민주당 1.7% △녹색당 6.8% △새 노동당 5.2%를 차지했다. 그러나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 된 이후인 1996년엔 △국민당 33.84% △노동당 28.19% △뉴질랜드 제1당(NZ First) 13.35% △뉴질랜드 연합당(Alliance) 10.10%로 양 대 정당이었던 국민당과 노동당의 비율이 떨어졌다.

현 52대 의회 구성이 이루어진 2017년 선거에선 △국민당 44.4% △노동당 36.9% △뉴질랜드 제1당 7.2% △녹색당 6.3% △Act 0.5%를 차지했다. 집권 여당인 노동당은 뉴질랜드 제 1당,녹색당과 연립 정부를 형성 중이다.
전문가들은 연립 정부가 구성되면서 자연히 거대 당이 힘을 주는 정책과 법안도 견제받게 됐고, 소수당이 주장하는 정책 역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집권당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뒤집어지는 양 당 체제의 부작용 역시 줄어들며 정책의 지속성도 높아졌다.

바울스 교수는 "경험론적 측면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이후 정책의 지속성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바울스 교수는 "집권 당인 노동당은 세금과 복지 시스템의 분배 수준을 현행보다 더 높이고 싶어하지만, 이를 위해선 (국민당이 주장하는) 세금 인상에 대한 논의를 동시에 해야 할 것이란 걸 알고 있다"며 "덕분에 현행 세금과 복지 시스템의 수준이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뉴질랜드와 호주 사이 해역인 타스만 지역에 대한 보존정책과 기후정책 역시 정책 지속성의 근거로 제시된다.


협상이 필수적인만큼 정책 변화가 어려운 점을 '소수당의 난립'이라 보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바울스 교수는 이는 동전의 양면일 뿐, 충분한 의견 수렴을 위한 과정이라고 했다. 결국 협상을 통해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정책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뉴질랜드 선거제 연구 기관에 따르면 선거제 개정 이후 국민들이 '정부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여론이 꾸준히 증가했다.

바울스 교수는 "협상을 거듭하며 극우과 극좌의 의견은 사라지게 되고 대다수의 국민들이 원하는 의견이 남게된다"며 "현 집권당인 노동당이 양도 소득세율을 높이려고 했지만 연립을 구성 중인 제 1당의 반대로 실패했다"고 최근 사례를 설명했다. 환경 파괴가 불가피한 자원관리법에 대한 제동과 카후랑기 국립공원에 대한 보존 결정 역시 녹색당이 힘을 발휘한 경우다.



협상 당사자인 리 의원 역시 "협상과정은 힘들지만 다양한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좋다"며 "과거 거대 양당 시절엔 집권당이 원하는 정책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다면 지금은 소수당과 함께하는 협상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검증 결과]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특성인 연립 정부하에선 협상이 필수적이다. 그 과정에서 정책 변화가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다양한 의원 구성을 바탕으로 충분한 의견 수렴이 가능해진다.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도 역시 높아져, 정치포용성 확대라는 장점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본 기획물은 한국 언론학회-SNU 팩트체크 센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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