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코드판이 꽂힌 서가에서 앨범을 골라 디자인을 꼼꼼히 들여다보다가 턴테이블의 바늘을 정성스레 내려놓는 행위, 그리고 레코드판의 표면을 긁는 듯한 음악 소리가 스피커로 흘러나오기 직전 1초 동안의 침묵.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손과 발과 눈과 귀, 심지어 레코드 표면에 쌓인 먼지를 불어내기 위해 가끔은 입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물리적인 감각을 더 많이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레코드판이 주는 경험에는 계량화할 수 없는 풍성함이 있다.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재미있는 경험이다.(책 '아날로그의 반격' 프롤로그 중)
데이비드 색스(David Sax) '아날로그의 반격' 저자는 아날로그가 디지털 세상에 반격하며,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이 아날로그 세상으로의 회귀를 지향한다고 설명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아날로그의 반격은 역설적이지만 고도로 진화한 디지털 기술로 인해 모든 게 빠르고, 좋아진 세상에 대한 반항심 때문에 시작됐다. '빠른 변화'들과 '새 것'들에 사람들이 질려버린 것이다.
한때 아이팟, 최신 휴대폰,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은 힙하거나 쿨한 것들이었지만, 모든 게 빠르고 좋아진 '디지털 세상'에 익숙해지면서 이것들은 더 이상 힙하거나 쿨하지 않아졌다. 유행을 선도하고 싶은 젊은이들은 자기 윗 세대가 더 이상 쓰지 않는 옛것들에 눈길을 돌렸다. 예컨대 최근 LP판이 LP세대가 아닌 18~24세가 주 소비층으로 부상하고 이들 사이 큰 인기를 끌며 부활했듯이 말이다.
아날로그 감성은 디지털 세계에 살며 메마른 사람들의 감성도 채워줬다. 0과 1의 이진법적 조합으로 표현되는 디지털은, 정확하지만 차갑다. 이에 인간의 깊고 섬세한 모든 면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 반면 아날로그는 디지털의 단절된 이진법이 아닌 연속의 개념이다. 그래서 따뜻하며 감정적이고 주관적이라고 인식된다. 아날로그 감성은 인간의 깊고 섬세한 내용을 전달하고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 여겨진다.
작가 스티븐 킹이 "모든 오래된 것이 머지않아 새로운 것으로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제 트렌드는 조금 오래된 옛 것, 그래서 아날로그 감성이 느껴지는 것으로 옮겨갔다. 전세계적으로 '레트로(복고) 열풍'이 불고있는 이유다.
이 같은 흐름에 따라 과거 폐허가 된 땅이나 버려진 건물 등은 오히려 가장 최신의 트렌드가 됐다. 힙스터들은 새로 지어진 건물 대신, 버려진 공업사를 재활용해 만든 카페, 과거 문을 닫은 공장에 만들어진 미술관, 아무도 찾지 않아 방치된 수영장을 리모델링해 만든 클럽 등을 즐겨찾는다.
이런 트렌드는 과거 번영했다가 폐허가 된,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도시들에 호재로 작용했다. 대표적인 게 독일 베를린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미처 아물기 전, 서와 동 두쪽으로 갈라진 도시. 또 갑자기 장벽이 붕괴되며 동쪽에 빈건물이 대거 남겨지게 된 도시, 베를린의 이 같은 특징은 아날로그 감성이나 복고 열풍을 그대로 잡아냈다. 유럽도시 마케팅 벤치마킹 리포트에 따르면, 베를린은 2015년 1237만명이 찾으며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에 이어 관광객이 많이 찾은 도시 3위에 자리했다.
이는 미국 디트로이트에도 호재로 작용했다. (☞美디트로이트는 정말 '강성노조' 때문에 파산했나 [이재은의 그 나라, 미국 그리고 도시재생 ①] 참고) 디트로이트는 포드, 크라이슬러, GM(제너럴모터스) 미국 자동차 3사가 위치하며 미국 자동차 산업의 부흥을 이끈 도시였지만, 1950년 185만명으로 인구 정점을 찍은 이후 꾸준히 인구 유출 현상을 겪은 뒤 '유령 도시' '파산 도시'가 된 곳이다.
디트로이트의 부활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2013년 인구는 70만명으로 줄어들었고, 같은 해 '포브스' 선정 '미국에서 가장 비참한 도시 1위'로 선정됐으며, 미 지방자치단체 역사상 최초로 파산을 신청한 시였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침체해 있던 '모터 시티' 디트로이트가 트렌디한 도시로 변모한 건 시에 내재된 아날로그 잠재력을 이끌어내면서다. 2010년대부터 디트로이트 다운타운과 미드타운을 재건하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업사이클링'(up-cycling) 방식을 통해서다. 업사이클링은 재활용(리사이클)을 넘어 흠이 있는 건물이나 아무도 쓰지 않는 공간을 철거하지 않고, 때 빼고 광낸 후 지역의 문화와 서비스를 담아 관광객을 지역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가리킨다.
도시 전체가 재건 사업 중인 만큼 호텔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업사이클링 프로젝트를 볼 수 있다. 자동차 판매점을 개조한 디트로이트 현대미술관(MOCAD)은 현대미술 전시를 비롯해 영화 상영, 패션쇼 등을 개최하며 지역의 문화 허브로 자리 잡았다. 도시에 방치된 폐허를 사무실과 엔터테인먼트 단지로 개조한 패커드 플랜트(Packard Plant)도 관광명소가 됐다.
4명으로 시작한 회사는, 5년 만에 540명이 고용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고, 이제 미국 제조업 부활의 상징적 존재가 됐다.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 제3세계의 값싼 노동력을 쓸 법도 하지만 시놀라는 미국인 고용을 고집한다.
시계제작은 태생적으로 많은 의사결정을 요구하는데 생산과정 더 많은 부분에서 '사람'이 관여하게되고 이런 경험은 그들이 회사의 일부라는 느낌을 준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공장을 견학하고 14개의 시계를 구입한 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시놀라 팬으로서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에게 시놀라 시계를 선물했다는 점 등은 시놀라가 더욱 유명세를 타게했다.
즉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이 하나 더 생기는 것보다 작은 레코드점이나 시계 공장이 들어서는 것이 지역 경제에 더 이윤을 분배해주고, 활력을 발생해준다는 것이다. 시놀라가 수백 명의 일자리를 만들어냈듯이 말이다. 디트로이트가 아날로그 감성의 정수로 떠오르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비닐(LP)레코드 브랜드 써드맨 레코드(Third man records)도 미드타운의 옛 공장을 개조해 디트로이트에 지점을 냈다.
여기에 대기업과 시정부도 디트로이트 부활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점이 큰 힘이 됐다. 미국 최대 모기지 대출업체인 퀴큰 론스(Quicken Loans) 창업자 댄 길버트 회장은 2010년 고향을 살리기 위해 본사를 디트로이트 시청 부근으로 옮겼다. 길버트 회장은 또 부동산 개발회사인 베드록을 설립해, 도심 빌딩에 투자했다. 수십억 달러를 들여 100개 이상의 빈 건물을 인수하고 개발했다. 도심 본사 직원수가 당초의 1700명에서 1만7000명으로 늘어나면서 디트로이트는 더욱 살아났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빅3' 브랜드도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섰다. 미국 자동차 노조와 '빅3'는 고용을 늘리기 위해 기존 근로자 임금은 동결하는 대신 새로 채용하는 근로자 임금을 절반 수준으로 낮추는 '차별임금제(Two-tier wage system)'를 통해 고통을 분담하고, 생산 원가를 낮추면서 회생이 가능했다. 정부 지원도 한몫했다. 2013년 3.3%던 GM의 영업이익률은 2017년 6.9%로 크게 높아졌다.
이제 디트로이트는 더 이상 '버려진 도시'가 아니라, '아날로그의 도시' '부활의 도시'가 됐다. 도시가 가진 스토리는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산업을 부흥시키고 있다. 2009년 6월 17%까지 치솟았던 디트로이트와 인근 지역을 포함한 메트로 디트로이트의 실업률은 2017년 12월 4.2%로 떨어져 미국 전체 실업률(4.1%)과 비슷한 수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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