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 죽었다"… 美디트로이트를 살린 '아날로그'

머니투데이 이재은 기자 | 2019.07.29 06:05

[이재은의 그 나라, 미국 그리고 도시재생 ②] 디트로이트, 아날로그 감성가진 도시… 업사이클링 방식으로 부활

편집자주 |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오랫동안 비워졌던 소방서를 재탄생 시킨 미국 디트로이트의 파운데이션 호텔. 트립닷컴 제공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듣는 행위는 하드 드라이브의 음악을 꺼내 듣는 것보다 더 큰 참여감을 주고, 궁극적으로 더 큰 만족감을 준다.

레코드판이 꽂힌 서가에서 앨범을 골라 디자인을 꼼꼼히 들여다보다가 턴테이블의 바늘을 정성스레 내려놓는 행위, 그리고 레코드판의 표면을 긁는 듯한 음악 소리가 스피커로 흘러나오기 직전 1초 동안의 침묵.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손과 발과 눈과 귀, 심지어 레코드 표면에 쌓인 먼지를 불어내기 위해 가끔은 입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물리적인 감각을 더 많이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레코드판이 주는 경험에는 계량화할 수 없는 풍성함이 있다.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재미있는 경험이다.(책 '아날로그의 반격' 프롤로그 중)

데이비드 색스(David Sax) '아날로그의 반격' 저자는 아날로그가 디지털 세상에 반격하며,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이 아날로그 세상으로의 회귀를 지향한다고 설명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아날로그의 반격은 역설적이지만 고도로 진화한 디지털 기술로 인해 모든 게 빠르고, 좋아진 세상에 대한 반항심 때문에 시작됐다. '빠른 변화'들과 '새 것'들에 사람들이 질려버린 것이다.

한때 아이팟, 최신 휴대폰,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은 힙하거나 쿨한 것들이었지만, 모든 게 빠르고 좋아진 '디지털 세상'에 익숙해지면서 이것들은 더 이상 힙하거나 쿨하지 않아졌다. 유행을 선도하고 싶은 젊은이들은 자기 윗 세대가 더 이상 쓰지 않는 옛것들에 눈길을 돌렸다. 예컨대 최근 LP판이 LP세대가 아닌 18~24세가 주 소비층으로 부상하고 이들 사이 큰 인기를 끌며 부활했듯이 말이다.

아날로그 감성은 디지털 세계에 살며 메마른 사람들의 감성도 채워줬다. 0과 1의 이진법적 조합으로 표현되는 디지털은, 정확하지만 차갑다. 이에 인간의 깊고 섬세한 모든 면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 반면 아날로그는 디지털의 단절된 이진법이 아닌 연속의 개념이다. 그래서 따뜻하며 감정적이고 주관적이라고 인식된다. 아날로그 감성은 인간의 깊고 섬세한 내용을 전달하고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 여겨진다.

작가 스티븐 킹이 "모든 오래된 것이 머지않아 새로운 것으로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제 트렌드는 조금 오래된 옛 것, 그래서 아날로그 감성이 느껴지는 것으로 옮겨갔다. 전세계적으로 '레트로(복고) 열풍'이 불고있는 이유다.

이 같은 흐름에 따라 과거 폐허가 된 땅이나 버려진 건물 등은 오히려 가장 최신의 트렌드가 됐다. 힙스터들은 새로 지어진 건물 대신, 버려진 공업사를 재활용해 만든 카페, 과거 문을 닫은 공장에 만들어진 미술관, 아무도 찾지 않아 방치된 수영장을 리모델링해 만든 클럽 등을 즐겨찾는다.

이런 트렌드는 과거 번영했다가 폐허가 된,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도시들에 호재로 작용했다. 대표적인 게 독일 베를린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미처 아물기 전, 서와 동 두쪽으로 갈라진 도시. 또 갑자기 장벽이 붕괴되며 동쪽에 빈건물이 대거 남겨지게 된 도시, 베를린의 이 같은 특징은 아날로그 감성이나 복고 열풍을 그대로 잡아냈다. 유럽도시 마케팅 벤치마킹 리포트에 따르면, 베를린은 2015년 1237만명이 찾으며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에 이어 관광객이 많이 찾은 도시 3위에 자리했다.

이는 미국 디트로이트에도 호재로 작용했다. (☞美디트로이트는 정말 '강성노조' 때문에 파산했나 [이재은의 그 나라, 미국 그리고 도시재생 ①] 참고) 디트로이트는 포드, 크라이슬러, GM(제너럴모터스) 미국 자동차 3사가 위치하며 미국 자동차 산업의 부흥을 이끈 도시였지만, 1950년 185만명으로 인구 정점을 찍은 이후 꾸준히 인구 유출 현상을 겪은 뒤 '유령 도시' '파산 도시'가 된 곳이다.

디트로이트의 부활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2013년 인구는 70만명으로 줄어들었고, 같은 해 '포브스' 선정 '미국에서 가장 비참한 도시 1위'로 선정됐으며, 미 지방자치단체 역사상 최초로 파산을 신청한 시였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침체해 있던 '모터 시티' 디트로이트가 트렌디한 도시로 변모한 건 시에 내재된 아날로그 잠재력을 이끌어내면서다. 2010년대부터 디트로이트 다운타운과 미드타운을 재건하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업사이클링'(up-cycling) 방식을 통해서다. 업사이클링은 재활용(리사이클)을 넘어 흠이 있는 건물이나 아무도 쓰지 않는 공간을 철거하지 않고, 때 빼고 광낸 후 지역의 문화와 서비스를 담아 관광객을 지역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가리킨다.

디트로이트에 숨을 불어 넣은 파운데이션 호텔. 트립닷컴 제공
그 시작을 알린 호텔이 바로 수십년 공건물로 남아있던 소방서를 개조한 디트로이트 파운데이션 호텔(Detroit Foundation Hotel)이다. 호텔에는 미쉐린 스타 셰프가 지휘하는 레스토랑과 로컬 디자인을 선보이는 팝업 스토어,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객실을 갖춰 세계 각지의 힙스터들을 디트로이트로 이끌고 있다. 이어 지난해 초에도 30여 년간 버려져 있던 월리처 빌딩(Wurlitzer Building)에 더 사이렌 호텔(The Siren Hotel)이 들어섰다. 이 호텔은 기존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에 파스텔 톤 색과 레트로풍 디자인을 가미해 지역의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도시 전체가 재건 사업 중인 만큼 호텔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업사이클링 프로젝트를 볼 수 있다. 자동차 판매점을 개조한 디트로이트 현대미술관(MOCAD)은 현대미술 전시를 비롯해 영화 상영, 패션쇼 등을 개최하며 지역의 문화 허브로 자리 잡았다. 도시에 방치된 폐허를 사무실과 엔터테인먼트 단지로 개조한 패커드 플랜트(Packard Plant)도 관광명소가 됐다.
시놀라 디트로이트 /사진=시놀라 홈페이지
오바마가 사랑하는 디트로이트산 시계 '시놀라'는 아날로그 산업 분야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이자, '아날로그 도시' 디트로이트의 부활을 상징한다. 시놀라는 1907년 구두광택제 회사로 출발해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에게 보급품으로 지급되면서 유명해졌지만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시놀라는 2011년 디트로이트에서 새롭게 창업했다. 시놀라는 시계를 비롯 구두약과 관련된 가죽제품을 생산, 이후 자전거 등으로 제품을 확대하면서 사람의 꼼꼼한 손길이 필요한 제품을 장인정신으로 만들어 내는 브랜드로 각인 됐다.

4명으로 시작한 회사는, 5년 만에 540명이 고용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고, 이제 미국 제조업 부활의 상징적 존재가 됐다.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 제3세계의 값싼 노동력을 쓸 법도 하지만 시놀라는 미국인 고용을 고집한다.
시놀라 디트로이트 /사진=시놀라 홈페이지
미국 장인의 정교한 솜씨와 독창성이라는 내러티브는 시놀라 마케팅에서 집요하게 언급된다. 시놀라 브랜드가 가장 중요하게 내세우는 건 디자인이나 가격이 아니라 '디트로이트의 장인이 만든 시계'라는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시놀라는 디트로이트를 브랜딩에 활용했다. 본부와 공장은 디트로이트 미드타운 인근에 위치한다.

시계제작은 태생적으로 많은 의사결정을 요구하는데 생산과정 더 많은 부분에서 '사람'이 관여하게되고 이런 경험은 그들이 회사의 일부라는 느낌을 준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공장을 견학하고 14개의 시계를 구입한 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시놀라 팬으로서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에게 시놀라 시계를 선물했다는 점 등은 시놀라가 더욱 유명세를 타게했다.
2015년 써드맨레코드가 디트로이트 캔필드 스트리트의 낡은 공장을 개조해 만든 매장/사진=써드맨레코드
'아날로그 반격'을 시작한 디트로이트에겐 한가지 호재가 더 있었다. 아날로그는 태생적으로 지역사회에 이윤을 가져다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색스에 따르면 승자독식, 소득 격차라는 문제를 야기한 디지털 경제와 달리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된 경제 모델은 기업들 간 이익의 균형을 맞춰준다.

즉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이 하나 더 생기는 것보다 작은 레코드점이나 시계 공장이 들어서는 것이 지역 경제에 더 이윤을 분배해주고, 활력을 발생해준다는 것이다. 시놀라가 수백 명의 일자리를 만들어냈듯이 말이다. 디트로이트가 아날로그 감성의 정수로 떠오르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비닐(LP)레코드 브랜드 써드맨 레코드(Third man records)도 미드타운의 옛 공장을 개조해 디트로이트에 지점을 냈다.

여기에 대기업과 시정부도 디트로이트 부활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점이 큰 힘이 됐다. 미국 최대 모기지 대출업체인 퀴큰 론스(Quicken Loans) 창업자 댄 길버트 회장은 2010년 고향을 살리기 위해 본사를 디트로이트 시청 부근으로 옮겼다. 길버트 회장은 또 부동산 개발회사인 베드록을 설립해, 도심 빌딩에 투자했다. 수십억 달러를 들여 100개 이상의 빈 건물을 인수하고 개발했다. 도심 본사 직원수가 당초의 1700명에서 1만7000명으로 늘어나면서 디트로이트는 더욱 살아났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빅3' 브랜드도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섰다. 미국 자동차 노조와 '빅3'는 고용을 늘리기 위해 기존 근로자 임금은 동결하는 대신 새로 채용하는 근로자 임금을 절반 수준으로 낮추는 '차별임금제(Two-tier wage system)'를 통해 고통을 분담하고, 생산 원가를 낮추면서 회생이 가능했다. 정부 지원도 한몫했다. 2013년 3.3%던 GM의 영업이익률은 2017년 6.9%로 크게 높아졌다.

이제 디트로이트는 더 이상 '버려진 도시'가 아니라, '아날로그의 도시' '부활의 도시'가 됐다. 도시가 가진 스토리는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산업을 부흥시키고 있다. 2009년 6월 17%까지 치솟았던 디트로이트와 인근 지역을 포함한 메트로 디트로이트의 실업률은 2017년 12월 4.2%로 떨어져 미국 전체 실업률(4.1%)과 비슷한 수준이 됐다.
미국 디트로이트 미시간 중앙역. /사진=AFP
하지만 디트로이트의 부활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지난해 6월에 포드 사가 오랫동안 버려져있었던 미시간 중앙역을 구입했다. 포드는 2022년까지 이곳을 자율 주행차 연구소로 탈바꿈하고, 포드 직원 2500여명을 이곳에서 일하게 할 방침이다. 디트로이트는 더 살아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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