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나 잘 있어 살만 해!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 2019.07.13 07:00

<177> 함순례 시인 ‘울컥’


1993년 ‘시와사회’로 등단한 함순례(1966~ )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울컥’은 아득히 멀어진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면서 안부를 묻고 있다. 사무치게 그리워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곰삭은 시를 읽다 보면 순간순간 울컥한다. 떠나보내고 그리워하면서, 견디면서 깊어진 사유는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한다. 한적한 고택에서 자분자분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시들은 “말을 아끼며 깊고 아득한 울림”(‘시인의 말’)을 주기에 충분하다.

내 방을 두드리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새는 어디쯤 날고 있을까

- ‘저녁에 내리는 비’ 전문


나도
누군가에게
이 말을 간절히 들려주고 싶다

나 잘 있어
살만 해!

- ‘진눈깨비 오는 날’ 전문

여는 시 ‘저녁에 내리는 비’는 내 곁에 가까이 다가왔으나 떠나고 없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새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저녁에 내리는 비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한때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한 사람은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어 내 곁에 잡아둘 수 없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가 떠난 저녁에도 비가 내렸을 것이고, 그날 이후 비가 내리면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날밤을 홀딱 지새웠을 것이다.

닫는 시 ‘진눈깨비 오는 날’은 지금 내 곁에 없는 사람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다. 그가 떠난 큰 산 앞을 흐르는 강가에서 “나 잘 있어요/ 살만해!” 마음속으로 외치고 눈물 흘리는 듯하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애절하고 애처롭다. 50편의 시 수록을 ‘비’로 시작하고, ‘진눈깨비’로 마감한 것은 봄에서 겨울까지 한 해의 흐름을 통해 그리움에 대한 애틋한 서정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밥그릇 속으로 지는 꽃
배롱나무가지를 흔드는 새 울음소리

온몸에 뿔을 세운 나무의 안쪽으로
야위고 수척한 태 감추는데

비 그치고 고요해진 시간을 틈 타
자신을 지우기도 하는데

새들이 들락거리며 만든
꽃발자국 환장하게 붉다

행여 다녀가시라고
훌쩍 뛰어오시라고

- ‘빈집’ 전문

‘저녁에 내리는 비’ 후속편과 같은 ‘빈집’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기다림, 연민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행여 다녀가시라고/ 훌쩍 뛰어오시라고”라는 마지막 문장을 감안할 때, 여기서 ‘빈집’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어 ‘빈집 같다’, 몸과 마음이 ‘빈집처럼 허전하다’라는 중의적 의미로 볼 수 있다. 상사병에라도 걸린 듯 “야위고 수척”해진 나는 “비 그치고 고요해진 시간을 틈 타” 겨우 마음을 비운다. 하지만 “새들이 들락거리며 만든/ 꽃발자국”을 보는 순간 마음은 무너지고 만다.

사는 일 재미없으면 어떡해요
딱 한번 뿐인데

달력, 전단지, 투표안내문, 보험안내서, 베이커리봉투, 약봉지, 곱게 펴고 말리고 다림질해 묶은 수첩을 받았다 페이지마다 한 집안의 이면이 고스란한데, 그 중에도 유난히 많은 약봉지, 이 세상에 없는 이름이 긴 그림자를 끌고 노를 젓는다

- ‘선물’ 전문

“당신을 보낸 후”에 “힘겨운 사랑에 매달리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시 ‘어머니’의 문장을 감안해볼 때, “이 세상에 없는 이름”은 어머니로 짐작된다. 몸이 아팠던 어머니는 “달력, 전단지, 투표안내문, 보험안내서, 베이커리봉투, 약봉지” 등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기록한 어머니의 낡은 수첩에는 “페이지마다 한 집안의 이면”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특히 “유난히 많은 약봉지”는 내 마음을 더욱 아리게 한다. 어머니의 유품을 보면서 나는 “딱 한번 뿐인” 삶을 재미있게 살겠다고 다짐한다.

단식 사흘째
메주농장 견학 갔다가
삶은 메주콩 한 알
공손히 받아
열 번 스무 번 씹었다
고요하던 뱃속
금세 요동쳤다
굶는 일

너무나 쉬웠다

- ‘콩 한 알’ 전문


날 잡아 칼을 갈았다
무뎌진 날들이 숯물에 배어 흘러내렸다
주기적으로 갈아야 한다지만
선득한 날이 싫어
좀체로 칼 갈지 않고 살았다
그냥 살아야지, 하고
작정하자마자 금세 예리해진 칼날
그 기운에 움찔했던가
바로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다행이다
내가 먼저 베었다

- ‘다행이다’ 전문

그리움에서 발화한 사유는 나를 “가슴 뜨거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나에게 묻는다’)게 한다. 단식 중에 어쩔 수 없이 받아먹은 “삶은 메주콩 한 알”에 뱃속이 요동치자 “굶는 일”이 “너무나 쉬웠다”는, 무뎌진 칼을 갈다가 손을 베이고는 “다행이다/ 내가 먼저 베었다”는 깨달음은 오랜 사유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제 옆구리에 낯선 이 들이는 거/ 사람도 쉬운 일 아니다”(‘나중엔 속까지 다’)나 “빽빽한 대를 솎아내자/ 대숲 소리다 다르다”(‘틈’), 봄숲에 들어 “머위잎, 산달래 욕심껏 따고 캐”다가 “풀꽃들 아슬아슬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라는 반성도 앞에 언급한 시들의 경향과도 다르지 않다.

함순례의 시는 대체로 가까운 곳보다는 먼 곳,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를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다. 수묵담채 같은 전체 분위기와 조금은 다른, 짧고도 강렬한 시 3편을 글 말미에 슬쩍 던져놓는다.

진흙더미 속에서도 별이 뜨는지
칠백 년 만에
눈 뜬 씨앗이 피워낸 연꽃 속에
불멸의 사랑에 이르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 ‘아라연꽃’ 전문


벚꽃 골목 돌계단 위
스미듯
스며들 듯
떨어진 꽃잎들의 긴
입맞춤

그 순간
우주가 기우뚱

- ‘화양연화’ 전문


지구별에 연착한 이들의
지독한 당혹감

아주 쓸쓸한 사랑의 꽃

- ‘배꼽’ 전문

◇울컥=함순례. 역락. 118쪽/13000원.




베스트 클릭

  1. 1 조국 "이재명과 연태고량주 마셨다"…고가 술 논란에 직접 해명
  2. 2 "싸게 내놔도 찬밥신세" 빌라 집주인들 곡소리…전세비율 '역대 최저'
  3. 3 한국은 2000만원인데…"네? 400만원이요?" 폭풍성장한 중국 로봇산업[차이나는 중국]
  4. 4 "거긴 아무도 안 사는데요?"…방치한 시골 주택 탓에 2억 '세금폭탄'[TheTax]
  5. 5 "아이 낳으면 1억 지원, 어때요?" 정부가 물었다…국민들 대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