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 죽기 전에 깨달아야 하는 2가지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 2019.07.10 06:00
최근 전 신문사 선배를 오랜만에 만났다. 퇴직 후 행방이 묘연(?)했던 그가 3년 만에 전화를 걸어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로 “니, 내 안 보고 싶었나?” 하며 반갑게 인사했다.

김치찌개를 앞에 두고 그가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평소 까칠하기로 소문난 그 선배는 가족이 운영하는 화원에서 일하는 얘기를 시작으로 고초의 세월을 영화처럼 쏟아냈다. 듣는 이의 귀가 가장 솔깃해진 대목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3년간 요양병원에서 돌본 이야기였다.

그는 농부의 생활을 하면서 매일 병원에 들러 어머니를 보살폈다. 본인이 직접 대소변까지 받은 건 물론이고 가족을 대신해 혼자 긴 세월을 어머니 곁을 지키면서도 불효의 흔적을 지울 수 없었다는 자책의 말도 잊지 않았다.

3년간 그는 수많은 죽음과 만났다. “오늘 아침에 들어와서 저녁에 나가는 사람도 봤고, 며칠간 신음하며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둔 사람도 봤다. 곁에서 죽음을 지켜보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다.”

살아있는 자와 죽어가는 자의 관계성을 저절로 확인하기도 했다. 그 선배는 ‘효자’로 통했지만, 바로 옆 병상의 젊은 남편을 보곤 효자 명찰을 떼야 했다. 24시간 아내 곁을 구도자처럼 지키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미안함이 올라왔다. 그런가 하면 70대 노부부의 병상은 이와 정반대였다. 아내 곁에 잠시 머물다 이내 자리를 뜨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선배는 여러 죽음을 목도하면서 절실히 깨달은 2가지 사실이 있다고 했다. ‘착하게 살자’와 ‘가진 능력을 베풀자’가 그것. 착한 삶의 실천을 누가 모르는가. 그것이 비로소 ‘제 것’이 되려면 나쁜 죽음으로 가는 일련의 과정의 삶에 대한 자극과 반성의 계기가 필요한 법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깨달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베푸는 일은 손해가 아닌 이익이다. 결국 죽음이 가까워져 올 때 그를 아끼고 기억하는 가장 손쉬운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결국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주는 정신은 살아있는 이 순간 필요한 각성인 셈이다.

다시 만난 그 선배의 말투와 행동은 달라져 있었다. 더 착하게 살고 그나마 가진 능력도 모두 베풀겠다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매사 욕심의 끈을 놓지 않고 ‘남’보다 ‘나’의 입장에서 세상을 통찰하는 한, 두 가지 가치는 여전히 뜬금없는 교과서적 철학으로 내팽개쳐질 뿐이다. 죽음이 두렵지만 수용될 수 있으려면 ‘지금, 이 순간’ 무언가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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