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감정을 희석하느라 반평생을 낭비했다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 2019.06.01 11:31

<174> 정선 시인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


2006년 ‘작가세계’로 등단한 정선(1963~ )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를 읽기 전에 두 개의 키워드를 먼저 머릿속에 그려야 한다. 첫 번째는 여행이다. 시인은 틈만 나면 혼자 여행을 떠나 낯선 사람들과 풍광을 마음에 담는다. 두 번째는 그림이다. 해외여행 도중 미술관을 찾는 시인은 풍부한 상식으로 화가와 그림을 시에 녹여낸다. 시인은 낯선 풍광과 사람, 그림이 만나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뛰는 신선한 이미지를 생산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고독한 자아가 숨어 있다. 좀체 내면을 드러내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상처와 통증이 밖으로 새어나올 때면 여러 색으로 덧칠을 해 보여준다. 덧칠한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거기 고독하고도 상처받은 영혼이 소리 없이 울고 있다.

머리 위에 낡은 구두를 얹고
페르낭드를 시작해야지
말라가는 사랑을 발효하는 곳
자클린,
어디에서도 불거진 광대뼈로 말라가를 노래할 것이야

마름모꼴 눈동자에 동그란 점을 세 개 찍는다면
우리의 귀는 같은 방향으로 길어질까
도라, 묻고 물으면 물음표가 새처럼 날아올라 싱싱해질까

말라가는 사랑이 농익어 잿빛으로 터지는 곳
그렇게 함축적으로…, 마리

오 센티만 기다리면 어둠이 새벽이 되고
낯섦도 설렘이 되는 말굽 모양 광장에서
예의 바른 파라솔에 침을 뱉고
오늘 아침 설교는 생략하기로

아름다움을 훼방 놓고자 하는 심리
과감하게 … 프랑수아즈,
엇박의 긴장을 즐기고 있어

어쩌면 뮤즈와 호구는 붓질 하나 사이
올가, 말라가는
꺼지지 않는 불이다
주체할 수 없이 솟아나는 붉은 마음을 읽는 거다

거친 붓질에 심장을 또 한 번 베이는
나의 페르낭드올가마리도라프랑수아즈자클린
그리고 … 에바들

안녕하세요 피카소 씨
아직 엔딩 크레디트를 올릴 수 없어요

- ‘말라가, 말라가’ 전문

먼저 여는 시 ‘말라가, 말라가’를 읽기 위해서는 사전 정보가 필요하다. 스페인 남부 휴양도시 말라가에는 피카소의 생가와 미술관이 있다. 여기 등장하는 “페르낭드올가마리도라프랑수아즈자클린”은 모두 피카소의 부인이나 연인들이면서 모델들이다. 피카소의 여성편력은 유명하다. 결혼해서도 바람을 많이 피웠다. 자클린 로크, 도라 마르,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를 따라 자살했다.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피카소의 첫사랑이다. 지독히 가난했던 시절에 만나 8년간 동거했다.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의 마지막 여인이며 부인이다. 피카소는 평생 일곱 명의 여성과 동거를 했고, 그중 두 명과 결혼했다.

이 시는 한 편의 연극공연이다. 주인공은 피카소와 그의 연인들, 혹은 피카소의 그림들이다. 주제는 피카소의 여성편력 비판. 연극의 배경인 말라가는 “사랑을 발효하는 곳”이면서 “사랑이 농익어 잿빛으로 터지는 곳”이다. 페르낭드가 “머리 위에 낡은 구두를 얹고” 등장하면서 연극이 시작된다. 자클린이 “어디에서도 불거진 광대뼈로 말라가를 노래할 것이야” 노래한다.

연이어 피카소의 연인(그림)들이 등장한다. 그때 의구심 하나가 시인의 옆구릴 쿡 찌른다. “어쩌면 뮤즈와 호구는 붓질 하나 사이”가 아닐까. 불륜이란 어차피 일방책임이 아니라 쌍방과실이니까. 시인은 곧 도리질 친다. “말라가는/ 꺼지지 않는 불”이고, 피카소의 “거친 붓질에 심장을 또 한 번 베이는” 순결한 에바(하와). 몸과 마음이 ‘말라’간다. 스페인 말라가의 피카소미술관이 문을 여는 한, 피카소 그림의 순회 전시가 열리는 한 ‘피카소’ 연극은 끝나지 않는다.

지산동 1975장 마당 높은 집
보라는 자꾸만 디귿자형 마당으로 흘러간다
뭐슬 잘혔다고 워디서 본데없이 햄부러
죽어도 나는 성님이라고 못 불르겄소
기어이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던 그 여자
어허이 뒷짐 지고 헛기침만 하던 아버지
불룩한 배를 내밀며 퐁퐁다리를 건너가던
본데없는 년 울 엄마를 몬당허게 본 년
그 팔뚝을 물어뜯지 못한 열세 살 아이


- ‘보라는 아프다’ 부분

나는 사고당한 울 엄마 목숨값으로 결혼했단다
아버지한테 버림받고도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던 거야
끔찍이 무서운 말은
그냥이라는 말
뒤집어 보면 살고 싶은 이유가 수없이 많다는 말
내게는 하찮은 이유들이 어린 나비에게는
절체절명의 ‘그냥’이다

- ‘모나크나비들’ 부분

이번에는 시인의 기억, 아니 자서전 속으로 들어가보자. 자서전 ‘지산동’편 “1975장 마당 높은 집”, 주인공은 열세 살 아이가 바라보는 광경이다. 어느 날, 바람을 피운 아버지가 애 밴 여자를 데리고 와 엄마한테 “성님”이라 부르라 한다. 안방을 차지하고 싶던 여자는 “죽어도 나는 성님이라고 못 불르겄소/ 기어이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지만 엄마를 당하지 못하자 “불룩한 배를 내밀며 퐁퐁다리를 건너”간다.

이 사태의 원인제공자인 아버지는 누구의 편도 못 들고 “뒷짐 지고 헛기침만” 하고 있다. “열세 살 난 아이”는 엄마 편을 들어 그 여자의 “팔뚝을 물어뜯지 못한” 미안함과 그 여자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평생 한으로 남았다. 보라는 “도드라진 흉터와 기억들의 불순물”, “애증”이면서 “날것”이다.

자서전을 조금 더 넘겨보자.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엄마는 사고를 당해 돌아가셨다. 그런데 나는 “엄마 목숨값으로 결혼했”다고 자책한다. 모나크나비는 가을에 겨울을 지내기 위해, 번식을 위해 “캐나다 북동쪽에서 캘리포니아에서 멕시코 중부까지 사천오백 킬로미터”를 이동한다. 봄에 되돌아오다가 잠시 멈춰 알을 낳고 죽고, 부화해서 성숙해진 나비는 대를 이어 북쪽으로 이동한다. 모나크나비의 이동이 생존이라면 엄마의 사랑은 “그냥이라는 말” 속에 다 담겨 있다. 뒤집어보면 사랑하는 “이유가 수없이 많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랑은 위험하다. 어른들의 잘못된 사랑으로 ‘어린 나’는 각인된 상처를 안고 평생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터져 나오는 감정을 희석하느라 반평생을 낭비했어
우울은 지구를 몇 바퀴 돌아도 스러지지 않아
떠날 때라는 걸 몸이 먼저 알지
이곳에서 나의 태양은 사각 빌딩에 걸려 날마다 굴러떨어지지
빌딩은 절망이야

곰팡내 나는 이름을 벗어 놓고
붉은 우울을 읽으러 지중해로 갈 거야
동화 속 카르카손을 돌아
검은 창이 무구로 빛나 더 슬픈
거기, 벌레 먹은 낙엽 같은 방종도 찬란한
삐거덕거리는 뼈도 일으켜 세운다는 콜리우르로 갈 거야

섞지 않을래 검은 창을 지중해로 칠할래 창문을 힘껏 젖힐래 태양을 들일래 오렌지빛 고독을 심을래 와인으로 촛불을 켤래 눈을 찌르는 빛깔로 고귀하게 눈멀래
어쩌면… 인간은 위로가 되지 않아

난 변덕스러운 파도보단 늡늡한 태양을 업을래
못다 읽은 원시의 태양들이 뒹구는 해변에서
수많은 기호들과도 생까고 호사스런 돼지가 될래
해바라기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오래도록 우울로 이글거릴래
그러다가 방종한 태양과 눈 맞아 불탈래

- ‘우울백서’ 전문

엄마의 여행에 이어 다시 엄마의 길을 가고 있는 시인은 ‘사랑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사랑은 가려운 곳을 긁어 주기”(‘작업의 정석’), “썩어 가는 달걀의 곤내까지 감싸 품는 것이 어미 닭의 미련한 사랑”(‘달걀 한 알’), “설렘은 처음 느낀 통증 같은 것”(‘via 인생은’)이므로 더 이상 “소모성 사랑을 논하지는 말자”(‘불현不協 팔월’)고 결론을 낸다. 대신 “나는,/ 함부로/ 모래밭에/ 뱉어진/ 한 톨 씨앗”(이하 ‘씨앗’)이므로 “나를 뿌리내리게 한” 내 안의 독을 키워 더 독하게 살아남고자 결심한다.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 시인은 많은 감정을 소모했다. 그 “감정을 희석”시키는 데 “반평생”이 걸렸다. 우울과 고독이 늘 따라다녔다. “지구를 몇 바퀴 돌”만큼 여행을 다녀도, “배가 터지도록 연두를 흡입”(‘결핍을 죽이는 방식’)해도 각인된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태양이 “사각 빌딩에 걸려 날마다 굴러떨어지”는 하루하루가 절망이다. “오래도록 우울”한 시인에게 여행은 탈출구인 동시에 고독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지중해를 여행하던 시인은 깨닫는다. “인간은 위로가 되지 않”고, 우울과 고독과 여행은 계속될 것임을. 땡볕에 “비닐봉지만도 못하게 뒹구는 시들”(이하 ‘격렬鄙劣도’)이 “소리 없는 살인병기”라는, 시가 내 영혼을 죽인다 해도 평생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정선. 문학수첩. 144쪽/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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