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정체된다는 것은 경북대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곧 최류탄 냄새가 버스 내에 진동을 하게 될 것이란 신호였기 때문이다. 버스에 갇힌 채 맡았던 최류탄 냄새는 어린 내게 충격과 공포였다. 그 때는 버스에서도 담배를 피던 시절이었기에 연기에 익숙한 후각을 가졌음에도.
내가 태어난 곳은 흔히 보수의 성지(?)라 일컫는 대구다. 그래서 최류탄 냄새가 가신 버스 안을 다음으로 지배하는 건 학생들을 향한 어른들의 욕설이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등교하는 것이 창피했던 나도 데모하는 사람들이 너무 싫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이 기억이 재소환된 것은 군에 복무하던 시절, 평소 친하게 지내던 간부의 중학교 시절 5.18 경험담을 들을 때였다. 경험을 토대로 한 생생한 묘사에 기억이 살아났고 냇가에 모여 놀던 친구가 군용 트럭을 타고 가던 군인들의 총에 맞고 눈앞에서 쓰러졌다는 얘기까지 들었을 때, 코에 매캐한 최류탄 냄새가 다시 나는 듯 했다. 그 간부는 군인들이 다시는 그런 일에 연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군인이 됐다고 했다.
80년대생인 내게 5.18은 어린 시절 데모의 기억에 인생선배들의 경험담이 덧씌워진 간접 기억이다. 그럼에도 어떠한 역사적 사실보다 가깝고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그 당시 광주에 계셨던 분들, 유족들의 고통과 아픔을 동시대를 살아오지 않은 우리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함께 기억하고, 함께 아파해야 한다. 광주시민의 역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시민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명절 때마다 외삼촌이 내게 했던 말은 "우리는 광주에 마음의 빚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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