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은 시각 중국 충칭 위중구 연화지에 있는 대한민국 임정청사.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일제의 박해가 심해지자 임정청사는 항저우, 자싱, 전장, 난징, 창사, 광저우 등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 1940년 4월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1945년 8월15일 광복때까지 운영된 마지막 임정청사다. 상하이 청사의 12배 규모인 이곳은 법무부와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등 각 부처 사무실이 있었다. 임정은 21년간 제법 체계가 갖춰졌다. 계단 양옆 건물 각 층엔 회의실 10여개와 외빈을 맞이하는 숙소 등이 있었다. 전시실엔 당시 대한민국이 정상국가로 운영됐음을 증명하는 각종 공문서들이 그대로 보존됐다. 이곳에서 대한민국의 뼈대가 형성됐다.
1919년 임정의 혼은 100년이란 시간을 타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됐다. 1919~1945년, 대한민국의 시작을 이끌었던 임정은 어떻게 운영됐을까. 또 독립운동은 어떤 돈으로 할 수 있었을까.
당시 미국과 중국 등 해외에 나간 국민과 국내에 거주했던 국민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임정 운영과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탰고, 일본과 전쟁을 했던 중국 장개석 정부가 지원한 돈이 투입됐다는 게 정설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바로 민족기업의 활약이다. 당시 기업인 중 나라를 위해 앞장선 사람들이 많았다.
LG그룹(당시 구인상회) 구인회 창업주가 대표적이다. LG는 중국 충칭 임정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구 창업주는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다"며 불쑥 찾아온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 1만원(80kg짜리 쌀 500가마)을 줬다. GS그룹 허만정 창업주도 안희제 선생이 만든 백산상회에 참여하며 중국 상하이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다. 당시 백산상회 자금 운반책이 윤현진 상하이 임정 초기 재무차장이다. 효성그룹은 조홍제 창업주가 1926년 6.10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옥살이를 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기업이 중국 저장성 자싱시에 진출하면서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임정 유적지 보존 활동 등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유적지 보호 활동을 펼쳤다.
미국에선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가 독립자금을 보내왔다. 유한양행은 1930년대 후반 미국 LA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면서, 1942년 재미한인으로 이뤄진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 주도했다. 까스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당시 동화약방)은 활명수를 판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내 비밀연락망도 동화약품에 마련됐다. 이름은 '서울연통부'였다.
이밖에 교보생명을 창업한 신용호 선생은 1940년 24살 나이에 중국 베이징 자금성 동쪽에 곡물 유통업 회사 북일공사를 세우고, 여기서 번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탰다. 우리은행(당시 대한천일은행)은 민족은행 역할을 했다. 일제 치하의 엄혹한 시기 국내 상인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상권을 보호하는 등 일본 금융자본에 맞서 민족 금융을 수호했다.
이들 기업이 세운건 결국 새로운 나라였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 기업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주백 한림대 교수는 "100년 전 기업들이 남모르게 독립운동을 지원한 그 정신은 나라를 올바르게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며 "그 정신을 지금 시대에 비춰보면 일자리를 창출하며 나라 발전에 기여하는 기업가 정신과 같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