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 기자 피살 사건은 어떻게 첫 여성 대통령을 냈나

머니투데이 김성은 기자 | 2019.04.07 06:47

신흥 정당인으로 대선 출마…집권여당 외교 베테랑 후보 꺾고 최연소·최초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

주사나 카푸토바 슬로바키아 대통령 당선인/AFPBBNews=뉴스1

정치 아웃사이더. 두 딸을 둔 싱글맘. 슬로바키아의 에린 브로코비치.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슬로바키아에서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자 최연소 대통령으로 당선된 주사나 카푸토바(Zuzana Caputova·46)에 붙는 각종 수식어다. 기성 정치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그녀를 대선의 길로 이끈 사건이 있다. 바로 30년 만에 최대 규모 시위를 촉발시킨 한 언론인 피살 사건이다.

◇정치·마피아 결탁 취재하던 얀 쿠치악의 죽음에 분노한 슬로바키아=지난해 2월 25일, 슬로바키아의 얀 쿠치악(27)기자는 자택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정치권 인사들과 이탈리아 마피아의 공생 관계를 탐사 취재중이었던 게 그의 죽음에 빌미가 됐다.

이 언론인의 살해에 연루된 혐의로 총 다섯 명이 기소됐다. 그 중에는 슬로바키아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중도 좌파 성향의 정당 '스메르(Smer)'와도 연관이 있는 기업인이 포함되기도 했다.

스메르는 1999년 창립된 정당으로 현재 슬로바키아 집권 여당이자 의회에서 가장 많은 의석수를 확보하고 있는 정당이기도 하다.

한 젊은 언론인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는 들불처럼 일었다. 1989년, 자유화를 이끌었던 '벨벳혁명' 이후 30년 만에 최대 시위였다는 보도들이 나왔다. 반정부 항의시위가 끊이지 않고 확산되자 같은 해 3월, 로버트 피코 슬로바키아 총리, 그의 최측근 로베르토 칼리나크 내무장관 등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 시위대 중에는 카푸토바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1년 후, 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이 됐다.

/AFPBBNews=뉴스1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카푸토바는 정부 최고위층의 부패 현실을 취재하다 암살자로부터 총격을 받아 숨진 젊은 언론인을 보고 "더 이상 앉아만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공무원들에 대한 부패가 핵심 관심사였던 시기, 카푸토바가 들고 나온 캐치프레이즈도 '악에 맞서 싸우자(Let's fight evil togeter)'였다. 그녀는 기성 정치에 반발해, 의회에 의석조차 구성하지 못한 신흥 정당 '프로그레시브 슬로바키아(Progressive Slovakia)'에 몸담고 대선에 출마했다.

그녀를 지지했다는 한 시민은 "우리 모두는 우리나라가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패한 정부에 맞설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며 "카푸토바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카푸토바는 결선투표에서 58%의 지지율로 스메르당의 지지를 받던 베테랑 외교관 출신 마로스 세프코비치 대선 후보를 물리쳤다.

당선이 확실시 된 것이 확인된 토요일 밤, 그녀가 처음으로 한 행동은 얀 쿠치악과 그의 여자친구를 위해 마련된 비공식 추모장소에서 애도의 마음을 담아 촛불을 켜는 것이었다.


/AFPBBNews=뉴스1


◇"환경운동은 용기의 교훈…정의와 공정이 우리의 강점"=카푸토바는 슬로바키아의 페지노크(Pezinok)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수도 브라티슬라바에 위치한 코메니우스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자신이 나고 자란 페지노크 지방정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이후에는 변호사로서 활동하는 동시에 비영리재단 '오픈소사이어티'에서 아동착취 문제를 다루거나 그린피스 캠페인 기획에도 참여했다. 유명세를 탄 것은 1999년, 토지 개발회사를 상대로 자신의 고향 페지노크의 불법 독성 폐기물 매립 문제를 갖고 싸우기 시작하면서다.

이 소송은 14년이나 이어졌고 결국 대법원까지 가 매립 불허 판결을 받아냈다. 그녀는 2016년, 이 공로를 인정받아 환경 분야의 노벨상으로 여겨지는 '골드만 환경상'을 받았다. 슬로바키아의 에린브로코비치란 별명도 이때 얻었다.

카푸토바는 "이 사건으로 하여금 기관들이 어떻게 운영되고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며 "그 사건은 정치와 경제 파워의 오만과 저속함을 알게 한 강렬한 경험이자 용기의 교훈이 됐다"고 말했다.

카푸토바는 경찰과 사법부에 대한 즉각적이고 체계적인 변화를 가할 것을 예고하는 한편, 동성 결혼이 불법인 슬로바킹에서 동성애 권리를 옹호했다. 기성 정치세대가 민족주의 색채가 짙었고 이민자들을 '강간범'으로 묘사하는 등 민족주의를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에 활용한 반면, 카푸토바는 친 유럽연합(EU) 성향으로 알려졌다.

슬로바키아는 실권을 가진 총리를 따로 두고 있어 대통령의 역할이 제한적이긴 하나 많은 변화가 예상되는 부분이다.

슬로바키아 일간지 '데니크N'은 카푸토바에 대해 "시스템의 에러(구체제에서 나올 수 없는 인물이란 뜻)이자 30년간 보지 못한 변화"라고 평가했다.

"우리는 그동안 정치에서 정의와 공정함이란 약함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것들이 사실 우리의 강점이란 것을 본다."(카푸토바, 2019.3.30 대통령 당선 직후)
/AFPBBNews=뉴스1



이 기사의 관련기사

베스트 클릭

  1. 1 [단독]구로구 병원서 건강검진 받던 40대 남성 의식불명
  2. 2 박지윤, 상간소송 와중에 '공구'는 계속…"치가 떨린다" 다음 날
  3. 3 [단독] 4대 과기원 학생연구원·포닥 300여명 일자리 증발
  4. 4 중국 주긴 아깝다…"통일을 왜 해, 세금 더 내기 싫다"던 20대의 시선
  5. 5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쯔양 복귀…루머엔 법적대응 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