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결론에 영향을 미칠 여러 가지 요소 중 최근 정부가 실시한 실태조사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청와대는 23만명이 지지한 '낙태죄 폐지' 청원에 8년만에 실태조사를 재개했다. 입법권은 없지만 실태조사 결과를 토대로 관련 논의를 한 단계 진전시킨 셈이다.
보건복지부 의뢰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2월 14일 발표한 여성 1만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성 75.4%가 낙태죄 처벌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고 답했다. 개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응답은 3.8%에 불과했다.
개정 이유를 보면 '여성만 처벌하기 때문에'란 응답이 66.2%(복수 응답)로 가장 높았고, 이어 '여성 건강권을 침해해서'라는 응답이 65.5%, '자녀 출산 여부는 기본적으로 개인 선택'이라는 응답이 62.5%를 차지했다.
낙태 폐지가 사회적으로 뜨거운 감자인 데다 폐지를 찬성하는 쪽이 늘어난 점을 고려하면 헌재가 심리과정에서 국민 감정과 여론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 15일 헌재에 '낙태는 위헌'이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공식 제출했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지난달 25일 전원위원회를 열고 '낙태한 여성을 형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여성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내기로 하고, 이를 실행했다. 인권위가 낙태와 관련해 의견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합헌을 고집했던 법무부에서도 미묘한 입장 변화가 감지된다. 낙태죄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기본 입장엔 변함이 없지만, 허용범위에 대해서는 전향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지난해 6월 청와대 방문 당시 "모자보건법 허용기준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정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최근엔 헌재 판결을 앞두고 UN 등 국제기구나 국제엠네스티 등에서 법무부를 꾸준히 방문해 낙태와 관련한 세계적인 추세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 선진국들도 여성들이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쪽으로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헌법상 낙태를 금지했던 아일랜드가 낙태를 금지한 수정헌법 8조를 개정키로 하는 등 국제적인 추세도 낙태죄 폐지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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