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본 듯한 전형적인 자수성가 이야기 같지만, 실제 주인공이 있다. 필리핀 최대 부호이자 아시아의 유통황제로 불리는 헨리 시 SM그룹 명예회장. 19일(현지시간) 그가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 그의 자산은 약 190억달러(21조3275억원), 세계 부호 순위(포브스)는 53위였다.
시 회장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924년 중국 푸젠성 샤먼에서 태어났지만, 가난을 피해 아버지와 필리핀으로 이주해야 했다. 마닐라 인근에 정착했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사리사리(sari-sari)라 불리는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버텼지만, 성공은 요원했다. 2차 세계 대전으로 끝나고 필리핀 경제가 무너지자, 현지 분위기도 냉랭해졌다. 화교 자본을 배척하는 현지인의 공격으로 시 회장의 가게도 불태워졌다.
시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군화를 팔면서 사업을 이어갔다. 이민자로 성공하기 위해 필리핀 현지 언어를 익히고, 2년제 대학에 진학해 경영을 공부했다. 밤낮없이 일하며 돈을 모은 시 회장은 1958년 마침내 마닐라 북쪽 마리키나 시(市)에 자신의 첫 가게를 열었다. 필리핀 최초로 매장에 에어컨을 트는 등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시도를 계속했다. '슈 마트(Shoe Mart)'라는 이름의 이 가게가 SM그룹의 시초가 됐다.
1972년에는 2만㎡ 규모의 백화점도 열었다. 경영은 당시 22세이던 시 회장의 장녀 테리시타 시-코손이 맡았다. SM그룹은 현재 필리핀에서만 70개의 대형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으며, 중국에도 진출해 쇼핑몰 7곳을 열었다. 이 가운데 마닐라의 '몰 오브 아시아'는 부지 면적이 42ha(1ha=1만㎡)에 이르는 아시아 최대 쇼핑몰로 꼽힌다.
유통업을 중심으로 사업을 키운 시 회장은 1974년과 1976년 각각 부동산과 금융 사업에도 진출한다. 필리핀 최대 은행 BDO유니뱅크와 차이나뱅크, 부동산개발회사 벨레 등이 모두 SM그룹 소속이다. 시 회장이 처음부터 여러 분야로의 사업 확장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유통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고민이 자연스럽게 사업 확장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백화점 매장 대지 확보가 어렵자, 직접 부동산 개발을 시작했고, 손님들에게 거스름돈 줄 동전이 부족해지자 이를 해결하려는 방편으로 은행을 인수한 것이다.
시 회장은 2017년 현역에서 은퇴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면서, 후계자로 6명의 자식 중 한 명이 아니라 전문경영인인 호세 시오를 지목했다. 원래 자식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려 했지만 장녀인 테리시타 시-코손이 시오 회장을 추천했으며, 장남인 헨리 시 주니어와 할리 시도 이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 매체 프라이머는 "시 회장의 감동적인 성공 이야기로부터 배울 수 있는 한 가지는 아무리 이루기 힘든 꿈이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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