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지막 '악기'는 언제였나요?

머니투데이 이강준 기자 | 2019.01.21 06:15
/사진=이미지투데이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꾼다." - 고(故) 노회찬 정의당 의원

그가 2010년 발행된 책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에서 남긴 말이다. 문재인 정부가 '저녁이 있는 삶'을 외치며 주 52시간 근로제를 시행한 지 반년이 넘었다. 그가 꿈꿨던 나라는 노동 현장에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을까.

여가시간에 취미로 '악기'를 연주하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2017년 12월 통계청이 발표한 '국민여가활동조사 통계정보보고서'에 따르면 퇴근 후 여가시간에 악기연주나 노래교실에 간다고 답한 비율(복수 응답)은 6.6%에 불과하다. 여가 시간에 가장 많이 한다고 답변한 취미 활동은 'TV시청(72.7%)'이었다.

'악기의 메카' 낙원상가도 낮은 악기 수요 때문에 불황 직격탄을 맞았다. 상가 내 130여개 점포를 관리하는 낙원상가 주식회사의 최난웅 부장(69)은 "2010년대 초반에 통기타 열풍이 불어서 그때 잠시 '반짝'했을 뿐 악기 불황은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최근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열풍 때문에 악기 판매량이 오르지는 않았냐"는 질문에 "아주 짧은 기간에 소폭 나아졌을 뿐, 대세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고 답했다.

악기를 연주하는 취미는 단순히 여가시간이 주어진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장기간 동안 일정 시간을 투입할 수 있어야 가능한 취미다. 예를 들어 피아노 곡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히 연주하려면 1주일에 몇 시간 이상, 1~2년 정도를 투자 해야 한다.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다른 악기들도 투입해야 하는 시간이 일정하게 있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여가시간의 '양'은 확보가 됐지만…여가시간의 '질'은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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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수동에서 근무하는 A씨(27)는 "퇴근 이후 업무 관련 카톡을 받아보지 않은 적이 손에 꼽는다"고 말한다. 그는 "주 52시간 근무제 이후에는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근무한다는 원칙은 지켜지고 있다. 하지만 퇴근 후 카톡이나 전화로 업무 지시가 들어오는 것이 일상"이라고 덧붙였다.

경기 안성에서 근무하는 B씨(35)도 상황은 비슷하다. 그는 "퇴근 이후에도 다시 회사로 복귀하라는 연락이 자주 온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언제 회사로 복귀해야 할지 몰라 등록했던 피아노 학원도 몇 개월째 못 가고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인들이 악기 연주를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를 업무시간과 여가시간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 데서 찾는다.


류웅재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교수는 "악기를 연주하려면 많은 시간을 일정하게 투입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많은 직장인들이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단순히 여가시간 확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업무와 여가 사이에 분명한 경계를 그어 '방해받지 않는 여가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52시간은 남 얘기…여가시간의 '양'조차 없는 경우도 많아



지난 6일 경기 고양시 덕양구 화정역 정류장에서 두꺼운 옷차림을 한 시민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주 52시간은 꿈도 못 꾸죠."

전라남도에 위치한 공공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C씨(27)의 말이다. 그의 근무시간은 공식적으로는 다른 공무원들처럼 '나인 투 식스'다. 하지만 그는 "주 52시간은 딴 나라 얘기"라며 "(오후)6시는커녕 저녁 9시에라도 퇴근하면 다행"이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또한 그는 "공식적으로는 주 최대 12시간까지 야근이 가능하다고 돼어 있지만, 공공연하게 직원들 대부분이 그 이상 14시간, 15시간씩 일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취직 전부터 계속 취미생활을 해오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취미를 그만 둔 경우도 있다. 서울 송파구에서 근무하는 D씨(26)는 "취미생활이 있느냐"는 질문에 "어렸을 때부터 악기연주와 작곡하는 게 취미였다"고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은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못해 개인적으로 아주 가끔 작곡만 한다. 악기나 작곡을 가르치는 학원을 등록할 수가 없다"며 씁쓸해 했다.

이에 52시간제가 도입됐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과도기적 시기여서 아직 직장 내 문화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카톡금지법', '칼퇴근법' 등이 많이 화제가 되면서 이런 악습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우리 직장 사회에 완전히 자리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로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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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프랑스의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넘어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사회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김성희 고려대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프랑스는 이미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우리나라도 방해받지 않는 여가시간을 위해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그는 "여가생활이 있는 직장인들도 대부분 '자기계발'에 몰두하고 있다. 악기연주 같이 다소 무의미해 보일 수 있는 취미조차도 마음놓고 할 수 있는 문화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근본적인 대책으로 '적정 업무, 적정 인력'을 제안하는 목소리도 있다. 근무시간이 제도적으로 보장돼어도 한 사람에게 주어진 업무량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퇴근해서 집에 있지만, 집에서 비공식적으로 잔업을 하는 소위 '그림자 근무'가 많아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진억 민주노총 나눔연대국장은 "업무량 자체를 조정하지 못하면 직장인들이 겪은 고충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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