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한국 사회에 빚이 갖는 의미

머니투데이 최종구 금융위원회 위원장 | 2018.12.28 04:24
기원전 2400년, 메소포타미아 리가시 지역의 엔메테나 왕은 모든 부채를 탕감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왕은 “나는 리가시에 자유를 퍼뜨렸다. 자식을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어머니를 자식에게 돌려주었다”라고 선언했다. 인류 역사상 첫 부채 탕감이자 ‘자유’라는 표현이 등장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쓴 ‘부채, 그 첫 5,000년’이라는 책에 담긴 내용이다. 그레이버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갈리지만 경제학자들이 놓치고 있던 부채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밝힌 기여는 인정받고 있다. 특히 1500조원을 넘는 가계부채에 직면한 오늘날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빚’은 하나의 상품으로 포장돼 거래된다. 전자상거래가 금융분야에도 확산돼 이제는 몇 번의 클릭만으로 빚을 얻을 수 있다. 상품의 외양을 띠었더라도 빚은 일반적인 상품과는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판매자는 아무한테나 팔지 않고 구매자의 소득, 직장, 경제사정을 꼼꼼히 확인한다. 누가 사느냐에 따라 가격(이자)이 다르다. 구매자는 복잡해져 가는 대출구조를 따라가지 못해 정보의 열위에 놓이게 됐다. 이런 이유로 대출계약은 사적 자치에만 맡겨지지 않고 엄격한 소비자 보호 규제가 적용된다.

더 큰 차이는 ‘빚’은 채무자의 인격과 결부돼 있다는 점이다. ‘투자’와 달리 ‘빚’은 사정이 바뀌더라도 반드시 상환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실직과 폐업한 사람을 맞는 것은 따뜻한 위로 대신 가혹한 추심이다. 법인이라면 법적인 소멸이라도 가능하지만 어쨌든 살아야 하는 개인은 삶이 비참해진다. 미국 초기 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는 “한 나라를 예속시키는 방법은 두 가지, 검(무력)과 빚”이라고 했다. 연체의 늪에 빠진 개인들에게 빚은 그 이상이다. 채무자 보호를 위해 일반 소비자 보호 규제 이상의 별도 정책 체계가 필요한 이유이다.

현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서민층 금융생활 안정을 위해 법정 최고금리를 연 24%로 인하하고 불법사금융을 엄정히 단속했다. 좀비 채권이 채무자를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도록 소멸시효 완성채권을 300만건 이상 소각했다. 내년 2월까지 진행될 장기소액연체자 지원방안도 효과를 내고 있다. 모두 오랫동안 시장밖에 방치된 한계차주를 위한 긴급조치이다.


이제는 서민금융 지원 효과가 시장 내에서 지속적으로 확산되도록 해야 할 시점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지난 21일 ‘서민금융지원체계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정책서민자금은 형편이 더 어려운 저신용층에 집중하고, 과다 채무자에 대한 실효성 있는 재기 지원을 위해 채무조정 감면율도 확대할 계획이다. 이러한 개편방안의 실행을 위해 민간 금융회사의 출연 방안도 제안했다.

일부에서는 도덕적 해이와 금융회사 부담 증가를 우려한다. 반면 이번 방안 마련 과정에서 좀더 나아가야 한다는 다른 반대쪽의 의견도 있었으나 담지 못했다. “원금의 몇 배를 넘는 이자는 금지해야 한다”, “빚의 돌려막기를 제한해야 한다”, “누구나 한번쯤 기댈 수 있는 무이자 대출상품이 있어야 한다” 등이다. 서민금융 정책에는 누구나 공감하는 ‘절대선’은 없으며 사회적 합의를 통한 ‘적정선’만 있을 뿐이다.

서두에 언급한 그레이버에 따르면 인류 초기 부채는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는 힘이었다고 한다. 부채를 가능케 하는 신뢰가 집단을 유지하는 힘이었으며, 인류는 부채가 자신들을 위협하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장치를 만들 줄 아는 지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빚의 또 다른 이름이 ‘신용’이다. 상호 신뢰에서 태동한 부채가 개인의 삶과 나아가 공동체를 위협하는 기형적 존재가 되지 않도록 살피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진 ‘빚’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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