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유교사상이 지배한 조선사회, 기득 집권층을 위협하는 기술주의론자들은 다산과 같이 당쟁의 희생양이 되곤 했다. ‘동의보감’을 집필한 허준과 ‘택리지’ 저자 이중환, 조선의 브리태니커 ‘임원경제지’ 저자 서유구 등도 유배를 면치 못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때아닌 과학자 정치 숙청 논란이 한창이다. 신성철 KAIST 총장 사태가 정점이다. 그가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총장 시절 해외 유명 연구기관과의 연구협약과 연구비 지급, 제자 채용 과정에서 비위 사실이 있다며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KAIST 이사회에 총장 직무정지를 요청하면서다.
그러나 비난의 화살은 신 총장보다 정부를 향했다. 감사 착수 배경과 징계처리 절차가 석연치 않다는 이유에서다. 신 총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초등학교 동창이다. 영남대 이사도 지냈다. 이 때문에 신 총장을 찍어내기 위한 표적감사가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파장은 컸다. 계약 당사자였던 미국 연구소가 과기정통부 장관에게 “문제없다”고 해명한 서한을 보냈다. KAIST 교수진을 비롯해 800명 넘는 과학자가 총장 직무정지 반대 성명서에 사인했다. 과학계의 반발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았다. 지난 14일 KAIST 이사회도 끝내 신 총장의 직무정지 결정을 유보했다. 정부의 직무정지 요청을 사실상 거부한 셈이다.
과기정통부로선 예상치 못한 결과다. 주무부처로서 정책 리더십에 심각한 오점을 남겼다. 과기정통부는 이사회 직후 성명서를 통해 “결정을 존중한다”면서도 “신 총장이 본질을 왜곡하고 국제문제로 비화시켰다”며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과학계 다른 현장에선 부실학회 참석자 징계 등 적폐청산 작업이 한창이지만 정부가 최우선으로 청산해야 할 과학계 적폐는 기관장 코드 인사 같은 정치권력의 개입 아닐까. 연구기관 본연의 임무보다 정치권력 줄대기가 우선되고 정권 입맛에 맞는 연구과제로 정부 예산이 집중되는 현실에서 과학기술 생태계의 혁신은 요원하다.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연구환경이 만들어지려면 정치권 개입을 원천봉쇄할 수 있는 과학계 인사시스템 정비가 우선돼야 한다. 정치 외풍을 타는 과학기술은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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