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끝판왕’ 궁예에게 관심법이란? feat. 신채호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 2018.12.01 07:57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97 – 궁예 : 잔혹한 폭군이냐 난세의 영웅이냐


출생의 비밀, 벼락출세, 복수, 초능력, 불륜…. 이른바 ‘막장드라마’에 들어가는 자극적인 재료와 양념들이다. 욕하면서도 시청하게 만든다는 이 막장의 요소들을 두루 갖춘 역사인물이 있다. 바로 후고구려의 건국자이자 태봉국 임금이었던 궁예(弓裔)다.


드라마 ‘태조 왕건’은 2000~2002년에 방영해 시청률 60%를 넘긴 전설적인 사극이다. 당시 왕건 못지않게 화제를 뿌린 극중 인물이 궁예였다.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관심법(觀心法)’을 시전하는 그의 카리스마에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옴마니반메홈” 주문을 흉내 내며 궁예가 폭군이냐 민중 영웅이냐,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궁예는 원래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로 후궁 소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길흉을 점치는 일관(日官)이 “이 아이는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자 왕은 비정하게도 사람을 시켜 죽이게 했다.


왕명을 받은 자는 갓난아기를 차마 살해하지 못하고 포대기에서 꺼내 누각 아래로 던졌다. 미리 짰는지 젖먹이는 여종이 아기를 몰래 받았는데 잘못해서 손가락으로 눈을 찔렀다. 궁예가 한쪽 눈을 잃은 사연이다. 유모는 아이를 데리고 멀리 도망쳐 고생스럽게 키웠다.


이 출생의 비밀은 뒤에 궁예가 나라를 세우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람들은 출생의 비밀에 관심이 많다. 백성은 새로운 지도자가 기왕이면 고귀한 혈통이길 바란다. 왕이 다스리는 시대이므로 임금의 핏줄이면 더할 나위가 없다. 사실이든 아니든 백성이 그렇게 믿으면 그런 거다. 통치의 정당성이 생기는 것이다.


나이 열 살에 출생의 비밀을 들은 궁예는 집을 떠나 세달사라는 절에 들어갔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것이다. 소년은 자기수양을 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이윽고 장성하자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그 무렵 ‘천년왕국’ 신라는 망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진성여왕 재위기에 나라가 큰 혼란에 빠졌다. 통치가 문란해지면서 지방 관리들은 왕명을 받들지 않았고 각지에서 도적떼가 들고 일어났다. 백성은 뿔뿔이 흩어져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야심가에게 ‘난세(亂世)’는 벼락출세의 기회다. 소위 막장드라마를 보면 회장님의 숨겨진 아들딸은 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홀연히 나타나 수습하고 인정받는다. 왕의 핏줄이라는 궁예도 나라가 흔들리자 백성을 구하겠다며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는 891년 죽주(경기도 안성)의 도적두목 기훤을 찾아갔다가 이듬해 북원(강원도 원주)의 세력가 양길에게 넘어갔다. 양길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신라의 요충지 명주(강원도 강릉)를 공략하는 임무를 맡겼다. 과연 궁예는 894년 명주를 손에 넣고 세력을 떨쳤다. 이때 휘하 병력이 3500여 명에 이르렀는데 백성이 계속 몰려들었다.


“언제나 병졸들과 고락을 같이 했으며, 주거나 빼앗는 일이 공평하고 사사롭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경애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삼국사기’의 묘사는 궁예가 어떻게 군대를 조직하고 민심을 얻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병사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했다. 이런 군대는 전장에서 장수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다. (그 부모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는 또 사람들에게 공평무사(公平無私)했다. 어느 시대나 백성은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사회가 공정해야 한다. 그 희망을 궁예가 보여준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지도자였다. 궁예의 명성과 위엄은 널리 퍼져 나갔다. 인심이 모이면서 세력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는 태백산맥을 넘어 철원을 점령하고 서쪽으로 진군했다. 오늘날의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일부가 궁예의 세력권이 되었다. 이 지역 호족들은 앞 다퉈 항복했는데 청년장수 왕건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되자 애초 그를 발탁한 양길이 발끈했다.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싶었는지 궁예를 공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양길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궁예는 선공으로 옛 상사를 제압하고 왕건을 앞세워 충청도까지 세력을 뻗쳤다.


901년 그는 송악(황해도 개성)을 도읍으로 삼고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원래 이름은 ‘고려’였다. 과거 고구려가 평양 천도 이후 쓴 국명을 부활시킨 것이다. 그럼 왜 ‘후고구려’라고 부르는 걸까? 그것은 뒤에 왕건이 건국한 또 다른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어쨌든 궁예는 이때 왕위에 올랐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해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래서 평양의 옛 도읍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삼국사기’에 실린 이 포부는 후고구려의 권력구도를 암시한다. 창업자는 궁예였지만 대주주는 패서지역, 즉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의 옛 고구려계 호족들이었다. 패서 호족들은 중국과의 무역, 운송업 등을 통해 엄청난 부(富)를 쌓았다. 그들의 재물이 없으면 나라가 돌아가지 않았다. 궁예가 송악에 터를 닦고 고구려 계승을 내건 이유다.

난세의 영웅에서 잔혹한 폭군으로

904년 궁예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면서 국가체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수도 또한 철원으로 옮기고 청주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그것은 왕이 패서 호족들로부터 벗어나려 했음을 의미한다. 원래 회장님은 주주들의 간섭을 싫어하는 법이다. 궁예는 왕의 권위를 한껏 높이고자 했다. 새 수도에 호화로운 궁궐과 누대를 지은 것도 그래서다.


그런 꼴을 패서 호족들이 곱게 볼 리 없다. 왕에 대한 불만이 나날이 커져갔을 터. 국론이 분열될 때 통치자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 시선을 돌리곤 한다. 궁예는 신라를 향해 칼을 빼들고 복수를 외쳤다. 자신을 버린 데 대한 개인의 복수요, 고구려를 멸망시킨 데 대한 호족들의 복수였다.
왕은 신라를 ‘멸도(滅都 : 멸망시켜야 할 나라)’라고 부르면서 신라에서 오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또 군사를 일으켜 경상도 서북부 지역까지 차지하고 아버지의 나라를 옥죄었다.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부석사에 이르렀을 때의 일화가 나온다. 부석사 벽에 그려진 신라왕의 모습을 보자 그는 칼을 뽑아 내리쳤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것을 원망해서 그랬을까? 물론 복수극 드라마라면 이런 설정이 가능하겠지만 실제로는 냉정하게 봐야 한다. 궁예는 복수의 깃발 아래 국론을 통합하려고 한 것이다. 그게 정치다. 하지만 호족들은 궁예에게 등을 돌렸고 급기야 딴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패서 출신의 새로운 실력자 왕건에게로 모여든 것이다.


왕은 결국 비상수단을 들고 나왔다. 911년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고치고, 스스로 미륵을 자처한 것이다. 미륵은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기 위해 온다는 부처다. 그는 머리에 금 고깔을 쓰고 몸에 네모진 가사를 걸쳤다. 행차할 때면 고운 비단으로 꾸민 백마를 타고 승려 200여 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도록 했다.


궁예는 백성이 염원하는 미륵의 이미지를 창출해 난국을 돌파할 속셈이었다. 그가 기댈 언덕은 백성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작용이 너무 컸다. 왕이 직접 불경을 쓰고 설법을 하자 고승 석총이 “요사스러운 말”이라고 반발했다. 궁예는 격노하여 철퇴로 쳐 죽였다. 호족들에 이어 그동안 자신을 떠받쳐온 불교세력까지 적으로 돌리는 순간이었다.


비난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자 왕은 극단적인 공포정치에 들어갔다. 흔히 ‘관심법(觀心法)’이라고 부르는 신통력이 등장했다. 누군가 거슬리거나 의심스러우면 그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다며 멋대로 죄목을 붙여 처단했다. 호족이고, 승려고, 관리고, 평민이고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때려죽였다. 심지어 자중을 청하던 왕비에게도 관심법을 발동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삼국사기’에 담긴 국왕 부부의 섬뜩한 대화다. 궁예는 불에 달군 쇠방망이로 아내를 고통스럽게 죽이고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자식들까지 살해했다. 이쯤 되면 ‘막장 끝판왕’이라 할 만하다. 태봉의 수도 철원은 공포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할 수 없이 장수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몰래 왕건을 만났다. 미치광이 임금을 제거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고 설득했다. 왕건도 관심법에 걸린 적이 있었다. 궁예가 반역자로 몰아세웠는데 부인하는 대신 짐짓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왕건은 결단을 내리고 왕궁으로 진군했다. 반정의 깃발 아래 1만여 명의 무리가 모였다. ‘미륵왕’은 산중으로 도망쳤지만 주민들에게 붙잡혀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다. 918년 왕건은 마침내 새 나라를 건국했다. 474년이나 이어진 고려왕조의 시작이었다.


고려시대에 편찬한 ‘삼국사기’는 승자의 역사다. 궁예를 잔혹한 폭군으로 깎아내려 건국의 정당성을 웅변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래도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는 꽤 호의적으로 다뤘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난세의 영웅이었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의 역사가이자 문필가인 신채호는 궁예를 모델로 역사소설 ‘일목대왕(一目大王)의 철추’을 썼다. 소설 속 궁예는 미륵사상을 실천에 옮긴 혁명가다. 빈곤과 억압에 시달리는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그들을 등쳐먹는 호족과 승려들이 반발하자 철퇴를 휘두른다.


신채호는 이 소설을 마무리하지 않고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다. 애초 그는 일제 강점 하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중 영웅담으로 한국인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잔혹한 폭군이었다는 패자의 역사는 아무래도 흥이 나지 않는다.


미완의 영웅담은 다른 마침표를 기다리고 있다. 화룡점정(畵龍點睛), 그림 속의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어 민중의 용이 날아오를 수 있다면…. 철원 비무장지대에 방치된 궁예의 옛 왕궁터에 그 단서가 묻혀 있을까?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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