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날]멀쩡하게 다니는 그놈, 억장이 무너진다

머니투데이 김건휘 인턴기자 | 2018.12.02 05:51

[학교폭력, 그 후(後) ②] 분리되지 않는 가해자, 계속되는 피해자의 고통

편집자주 | 월 화 수 목 금…. 바쁜 일상이 지나고 한가로운 오늘, 쉬는 날입니다. 편안하면서 유쾌하고, 여유롭지만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오늘은 쉬는 날, 쉬는 날엔 '빨간날'

/사진=unsplash
#대학생 민태준씨(23·가명)는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민씨는 책상에 분필가루를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일진'으로 불리던 학생에게 수차례 뺨을 맞았다. 선생님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가해 학생은 1주일간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학급 분리는 이뤄지지 않았고 민씨는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수업을 들으며 지내야 했다. 불안에 떨던 민씨는 결국 한 달 만에 부모님께 "전학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학교폭력 피해자에 대한 조치가 부실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7월 투신해 숨진 인천 미추홀구 중학생 A양(16)이 2년 전 학교폭력을 신고했음에도 재학 기간 내내 학교 폭력에 시달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커졌다. 학교폭력 피해자 및 관련 단체는 교육 현장의 대응이 부족하며, 보다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처벌 강화만이 능사가 아니며, 일선 학교는 과부하 상태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해결이 쉽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푸른나무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이하 푸른나무 청예단)은 지난해 전국 초등학교 2학년~고등학교 2학년 학생 6675명을 대상으로 '2017 학교폭력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이에 따르면 '학교폭력 피해 후 어떤 조치를 받았는가'라는 질문에 '아무런 도움도 없었다'고 응답한 학생이 38.6%로 가장 많았다. '가해 학생의 사과나 보상을 받았다'(9.1%), '자치위원회의 보호조치를 받았다'(2.7%)고 응답한 학생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같은 조사에서 학교폭력 가해 유경험자를 대상으로 한 '학교폭력 가해 후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에는 ‘학교 선생님께 혼났다’(41.5%), ‘아무 일도 없었다’(26.8%), ‘부모님께 혼났다’(16.6%) 순으로 응답했다. '자치위원회에서 가해학생 선도조치를 받았다', '경찰서에 신고되어 조사 및 법적 처벌을 받았다'는 각각 0.6%, 0.9%에 불과했다.

차민희 푸른나무 청예단 팀장은 "피해 학생에 대한 완전한 보호가 이뤄지지 않는 현실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차 팀장은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분리하는 경우가 많다"며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학급 분리' 등의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피해자에게는 '2차 가해'가 될 수 있으며, 실제로 피해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차 팀장은 분리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피해 학생들이 등교거부를 하거나 상담실에만 머무르는 등 겉도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사진=unsplash
경기 일산시 B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이아린양(18·가명)은 몇 달째 심각한 학교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이양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몇몇 학생들의 폭력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욕설 정도였지만 괴롭힘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다.

지난 8월, 누군가 이양에게 우산을 건넸다. "지금 바로 펴봐"라는 말에 아무 생각 없이 우산을 펼치자 이양의 머리 위로 라면 국물이 쏟아졌다. 가해 학생이 장우산 안에 라면 국물을 부어 놓고 묶어둔 것이었다. 징계를 위한 '학교폭력위원회'는 두 달이 지나서야 열렸고, 그나마도 주동자에게 '서면 사과' 조치를 내리는 선에서 끝났다.

이양은 "저는 계속 힘든데, 가해자들은 왜 멀쩡하게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며 "물리적인 폭행은 그쳤지만 심적인 압박을 계속 받는다"고 말했다. 학폭위까지 열렸음에도 가해자들이 격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도 했다. '라면 국물' 사건 이후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이양은 장우산을 펼치는 게 두려워 접이식 우산만 들고 다닐 정도다.


그는 "학교폭력은 기본적으로 피해자를 중심으로 생각해주면 좋겠다"며 "적어도 공간 분리를 선택할 권리는 피해 학생에게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헌옥 변호사는 "피해자를 상담하다 보면 같은 학급에서 생활한다는 부분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며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로 분리하는 등 직접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정 변호사는 전주덕진경찰서에서 청소년비행대책협의회 의원을 맡고 있다.

한편 정 변호사는 "학교폭력에 대한 징계 수위가 약한 경우가 많다"라며 "형사미성년자 연령 하향 및 소년법 개정 역시 고려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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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김재윤 전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밝혔다. 김 교수는 "처벌 강화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소년법 개정 등의 논의는 정치인들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편해지려는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학교폭력을 다루는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상우 실천교육교사모임 교육활동보호팀장은 현장에서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 팀장은 "학교 역시 피해 학생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싶지만, 학교폭력 업무처리와 학부모 민원이 과중해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교사가 수업과 생활지도에만 전념할 수 있게끔 학교폭력 제도를 개선해야 하며, 교육청의 지원 역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팀장은 공신력 있는 외부 상담 기관과 대학·교육청·학교의 연계로 진행되는 피해학생 '치유 상담'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 팀장은 "심각한 학교폭력의 경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가 필요하다"면서도 "같이 모여 진실한 사과와 화해, 치유의 자리를 갖는 '회복적 서클'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아울러 "학교는 처벌만으로 해결할 공간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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