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 랩소디’가 관객 500만 명을 눈앞에 두고 지칠 줄 모르는 뚝심을 과시하고 있다. 비주류의 성장사, 성 소수자의 편견과 맞서 싸우기, 음악에 열정 등 익히 알려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는 데도, 관객들은 쉴 새 없이 '떼창'으로 화합하고 비주류 스토리에 공감하고 아스라이 사라진 주인공의 지난날을 추억한다.
같은 퀸의 노래와 이야기인데, 왜 다른 해석과 공감으로 애정을 퍼붓는 걸까. 우선 음악이 결과(done)로 보여주는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과정(doing)에서 드러내는 스토리텔링의 진한 여운으로 채색됐기 때문이다.
뮤지컬인지, 록인지, 팝인지, 클래식인지 도통 알 수 없는 곡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성 강한 브라이언 메이(기타)에게조차 영혼이 실린 연주를 표현하라며 재촉하는 장면이나 ‘갈릴레오~’하는 합창 부분을 가장 높은 음역으로 주문하는 대목에선 곡의 고품질을 위해 뮤지션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여실히 체감할 수 있다.
그 스토리를 읽고 곡을 들으면 미국 평론가들이 쉽게 폄하한 비평이 무색해진다. 우리는 그간 쉽게 따라 불렀지만, 영화를 본 뒤엔 아껴서 불러야 할 수작임을 절감하게 되는 셈이다.
스토리는 첫 공연에서 가사를 틀려도 자신의 색깔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프레디 머큐리의 무대 매너나 에이즈(AIDS)로 목이 잠긴 상황에도 10만 명 관객 앞에서 절창을 잊지 않았던 그의 음악에 대한 신념에서 단순한 청취를 ‘감동’으로 연결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백미는 비주류를 위한 비주류의 외침이다. 머큐리는 전자공학도, 치의대생, 물리학도 등 ‘잘난’ 멤버들 사이에서 비주류 이란계 조로아스터교도 출신의 이방인이다. 게다가 동성애자로 성 소수자의 굴레에서 늘 의심과 비난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머큐리는 그럴수록 외쳤다. ‘엄마, 방금 한 남자를 죽였어요’로 시작하는 ‘보헤미안 랩소디’의 첫 가사가 주는 암시는 또렷한 결말 대신 이중의 철학적 고뇌를 안기는 식으로 내면의 자신과 싸웠고, 슬픔과 고독이 밀려올수록 더 빠르고 신나는 노래로 질주했다.
머큐리를 향한 관객의 동화(同化)는 동정이 아닌 희망일지 모른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어려운 시대에, 수 많은 보헤미안이 마지막 절망에서 찾은 한 줌의 희망이고, 누군가와 다른 길을 가는 이들에게 주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기댈 곳 없는 보헤미안의 눈물을 닦아주는 진심을, 우리는 퀸의 음악이 아닌 인생에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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