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 보(약 16km)를 걸었는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낯선 도시에서 얻은 기대 이상의 풍경 때문이었을까. 고인 침을 몇 번이나 삼키면서 움찔했던 몸의 반응에서 동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또 다른 ‘나’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각박한 도시생활에 찌든 나른한 자아에 생기를 불어넣는 도시, 에스토니아 탈린의 민낯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 도시의 80%가 훼손된 폴란드와 달리, 탈린은 89%의 보존력을 자랑한다. 1918년 제정 러시아에서, 그리고 1991년 소련에서 두 번 독립한 에스토니아는 외세 침공의 역사를 잊은 듯 독야청청 제멋을 간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1400년대 중세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돼 보는 즐거움이 넘쳤다.
탈린의 구도시는 여행의 정수다. 올드타운이 시작되는 비루게이트는 동화 여행의 첫 장을 여는 입구다. 원뿔 모양의 두 탑이 반가운 인사를 건네기 무섭게 타운 곳곳은 재빠른 걸음을 용납하는 법이 없다.
고딕 건물의 예스러움에 푹 빠지다가도 커피 4, 5잔은 거뜬히 마실 정도로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노천카페와 전통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타운 한쪽에 재즈 트리오가 연주하는 ‘오텀 리브스’(Autumn Leaves)를 들을 땐 배경과 연주의 절묘한 조화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중세풍 미학을 한 번에 알 수 있는 곳은 시청광장 들머리에 있는 ‘올데 한자’(Olde Hansa)다. 13세기 한자동맹(북해·발트해 연안 도시들이 상업적 목적으로 결성한 동맹)이 사용하던 곳이 ‘옛것’을 그대로 품은 레스토랑으로 변모했다.
이곳은 점원 복장부터 음식·시설까지 죄다 중세풍으로 둘렀다. 3층 건물 어디에도 ‘전기’를 공급하지 않고 양초로 불을 밝히고 화장실도 중세 시대 그대로 놓아 사용하기 애매했다. 음식도 멧돼지 고기, 곰 고기 등 중세시대 콘셉트를 따랐다.
올드타운은 크게 상인과 일반인이 거주하는 저지대와 영주·귀족들이 머물던 고지대로 나뉜다. 식당·카페·기념품점은 저지대에, 교회와 기관들은 고지대에 있다.
시청 광장을 가로지르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 있다. 1422년 문을 연 약국은 말린 두꺼비 가루 등 중세 약재를 전시하는 소형 박물관과 진짜 약을 파는 약국으로 구성됐다.
구도시의 상징은 올레비스테 교회로, 높이만 무려 123m다. 1500년쯤 완성됐을 땐 159m 높이를 자랑했으나 3번의 화재로 재건축을 거쳤다. 입장료(3유로)를 내면 종탑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데, 동화 같은 마을의 실체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시청 광장 서쪽 돌계단에 이르면 고지대의 상징인 툼페아 언덕과 만난다. 제정 러시아가 권력의 상징으로 세운 알렉산드르 넵스키 성당 등 에스토니아를 점령했던 나라들이 내세운 ‘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구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신시가지는 한국의 홍대 같은 느낌이 배어있다. 크리에이티브 시티로 불리는 ‘텔리스키비’다. 아트를 방불케 하는 세련된 빌딩이 모여있지만, 구도시 못지않은 ‘작은 아름다움’들이 적지 않다.
전도연과 공유가 출연한 영화 ‘남과 여’의 배경이 된 레스토랑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되는 예쁜 풍경을 선사한다. 옛 공장 외벽에 그린 그래피티 하나에도 예술적 영감이 녹아있고 주변 벼룩시장과 중고 시장엔 따뜻함이 그윽하다.
에스토니아는 인구 130만 명이 사는 작은 나라지만 블록체인 기술을 통한 첨단 전자정부를 구현한다. 어떤 도시보다 빠른 기술 혜택에도 그 풍경은 아늑한 추억의 시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이 어색한 공존은 매번 ‘무엇이 펼쳐질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던 골목길 탐방처럼 신세계로 이어진다.
하루 2만 보씩 다음날에도 강행군은 이어졌지만, 볼 때마다 새롭고 두근거렸다. 눈으로 즐겼다가 마음으로 새겨진 오랜만에 만난 절경이었다.
▶에스토니아에 가려면
직항은 없다. 인천에서 헬싱키로 가는 핀에어로 9시간 30분쯤 간 뒤 헬싱키에서 탈린 구간을 크루즈로 2시간 걸리는 여행을 추천한다. 공용어는 에스토니아어지만 인구 30%는 러시아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한다.
화폐는 유로, 전압은 220V를 쓴다. 전자정부답게 와이파이가 훌륭하다. ‘혀의 기쁨’을 알리는 음식들이 즐비하다. 특히 검은 호밀빵 ‘레이브’는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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