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반으로 줄여야"…타노스와 '확신범'

머니투데이 이상배 기자 | 2018.10.26 04:00

[the L]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숭고한 신념에 따른 '확신범'도 위법성 알았다면 처벌…'사법농단 키맨' 임종헌의 운명, 후배 법관 손에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학살하려는 범죄자에게도 명분은 있었다. 영화 '어벤져스 3: 인피니티 워'에 악당으로 등장한 '타노스'의 얘기다. 조시 브롤린이 연기한 타노스는 '우주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다. 자신의 고향 행성 '타이탄'이 인구증가와 자원고갈로 멸망하는 걸 지켜본 뒤부터다. 우주를 자멸로부터 구하려면 생명체의 수를 절반으로 줄여 자원과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비단 영화 속 얘기만은 아니다. "미국이 우리를 살해하는 것처럼 우리도 모든 미국인을 살해하는 성전을 벌여야 한다"고 설파하는 이도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에 사살된 뒤 국제테러조직 알카에다를 이끌어온 아이만 알 자와히리다. 유대인 600만명이 희생되는 비극도 아돌프 히틀러의 삐뚤어진 신념에서 비롯됐다.

형법이론에선 이런 이들을 '확신범'(確信犯)이라고 부른다. 도덕적, 종교적 또는 정치적인 의무 의식에 입각한 신념에 따라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말한다. 독일의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흐가 1922년 바이마르공화국의 법무부 장관으로서 독일 형법 초안을 만들 때 처음 도입한 개념이다.

우리나라에선 고(故) 노회찬 전 정의당 원내대표의 발언으로 한때 '확신범'이 화두가 된 적이 있다.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진 직후인 2016년 10월21일 국회 운영위원회의 국정감사 때였다. 노 전 원내대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향해 "죄의식이 없는 확신범"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여당은 "국가원수에 대한 금도를 벗어난 폭언"이라며 노 전 의원에게 십자포화를 쏴댔다.

최소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박 전 대통령의 신념과 무관치 않다. "평소 나의 신념은 종북단체와 친북단체 등 반국가 단체들이 지원을 받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예술의 자유와 창의성은 존중돼야 하지만, 종북단체들이 문화예술을 빙자해 국민을 현혹시키는 것은 막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2017년 4월12일, 박 전 대통령이 서울구치소에서 검사로부터 조사를 받으며 한 말이다.

그러면서 박 전 대통령은 “유권자들은 대통령 후보들의 정책과 이념과 생각을 보고 자신들의 입장과 같은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이라며 "그런 국민들이 선출해 준 대통령은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라고 했다.


새삼 '확신범'이란 단어가 떠오른 건 재판개입·법관사찰 등 '사법농단' 사건의 핵심인물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검찰에 불려나오는 모습을 보면서였다. 임 전 차장은 법관 시절 '판사 같지 않은 판사'로 불렸다. 탁월한 친화력 때문이다. 혹자는 '검사 같은 판사'라고도 했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유별나서다.

임 전 차장의 '충정'(?)에 불을 붙인 건 '상고법원 도입'이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오랜 꿈이었다. 예순 넘은 대법관들이 1년에 한명당 약 1000건의 사건을 처리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임 전 차장의 피를 끓게 했다. 대법원 대신 상고사건의 대부분을 처리할 상고법원이 생기면 고위 법관의 자리도 늘어날 터. 양 전 대법원장 뿐 아니라 후배 법관들을 위해서도 상고법원은 반드시 도입돼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대법관이 되려는 '출세욕' 아니냐고? 물론 그것도 없진 않았을 거다. 그러나 그가 사석에서 상고법원 반대론자들에게 보였던 적개심은 '욕심'보다 '신념'의 무게가 더 컸음을 말해준다.

애초에 상고법원은 임 전 차장이 아닌 양 전 대법원장의 신념이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역대 미국 연방대법원장 가운데 윌리엄 태프트를 가장 존경하는 건 그가 상고허가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주군'의 꿈을 자신의 꿈과 동일시한 임 전 차장은 이제 구속의 기로에 서게 됐다.

아무리 숭고한 신념에 따라 행동한 '확신범'이라도 그 행위의 위법성을 알았다면 처벌을 받긴 마찬가지다. 그게 사법부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이제 판단은 후배 법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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