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아리고, 저미고, 울멍울멍한 것들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 2018.10.20 10:33

<158> 김보일 시인 '살구나무 빵집'

2017년 '문학과행동'으로 등단한 김보일(1960~ )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살구나무 빵집'은 기억을 소환하는 몽상의 숲이다. 시인은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를 그림 그리듯 재현하면서 풍부한 지식과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로 시를 쓴다기보다는 그린다. 하여 그의 시는 읽지 말고 보아야 한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보고 있으면 시인이 옆에서 조곤조곤 사물과 대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느 순간에 '보일'이라는 몽상의 숲으로 빠져든다.

저녁 산책길 철길공원 한쪽에
간판 하나가 등을 달고 서 있다

살구나무 베이커리

살굿빛 식빵을 떠올리며
빵냄새가 새어나오는 안쪽을 들여다보니
앞치마를 두른 젊은 부부가 차를 마시고 있다

어떤 살구나무가 저들에게 이름을 떨구고 갔을까

살구나무도 보이지 않는데
삼월의 저녁이
초파일처럼 환했다
- '살구나무 빵집' 전문

"삼월의 저녁"에 시인은 철길공원을 산책한다. 그의 눈은 "공원 한쪽" "살구나무 베이커리"라는 "등을 달고 서 있"는 간판에 멈춘다. 살구나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시인은 살구꽃이 환하게 핀 옛 풍경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게 피어있는 살구꽃과 그 꽃을 지긋이 바라보는 정겨운 사람들. 시인의 가슴은 그리움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다. 간판에 살구나무를 불러들인 사람들이 누구일까 궁금하다. "빵냄새가 새어나오는 안쪽을 들여다보니/ 앞치마를 두른 젊은 부부가 차를 마시고 있다". 시인이 상상했던 것 이상의 따뜻한 풍경에 시인은 늘 가지고 다니던 노트를 꺼내든다. 순식간에 시 한 편을 그린다. 삶이 힘들 때마다 시인은 저녁 산책길에 4월 "초파일" 연등처럼 환한 그 집 앞을 서성거렸을 것이다.

여름이 느릿느릿 걸어 칠월의 문턱에 와 닿던, 낙타표 문화연필의 시절, 연필심 하나 부러져 어린 가슴의 지붕이 내려앉았다 오늘 침대 위에서 4B연필이 부러졌다 침대가 왼쪽으로 기우뚱했고 머리에서 붉은 피라미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속내가 무르고 한없이 부드러운 이 연필은 아침의 미소나 한낮의 구름을 그리기 알맞은 도구였다 연필은 작업실이 따로 없는, 나의 화실인 침대에서 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졌다 부러진 이 연필은 연필이 아니다 연필은 나무의 겨드랑이를 거쳐 손목에서 뻗어나간 손끝이고 구름의 눈가에 우거진 눈썹이고 오월의 가슴에서 뻗어나간 두 개의 지붕이고 너에게서 나에게로 오는 천 개의 유리창이다 천 개의 유리창이 깨지면서 손끝이 떨리고 눈썹이 뽑히고 지붕이 내려앉고 새들이 깨어진 유리창으로 날아들었다 이 연필은 분명 연필이 아니다 연필이란 이름을 빌어 내게 온 어떤 짐승의 아름다운 얼굴이고 죽음이다 낙타들의 비명소리가 그곳까지 들렸다면 네가 부러진 연필의 이름이다
- '부러진 연필' 전문

'연필'은 향수를 자극하는 물건이다. 혀끝에 침을 묻혀 꾹꾹 눌러 글을 쓰던 몽당연필, "낙타표 문화연필". 많은 시인들은 머리맡에 항상 필기도구를 두고 잔다. 잠들기 전에 떠오른 시상을, 꿈속에서 쓴 기가 막힌 시를, 일어나자마자 맑은 정신으로 받아 적기 위해서다. "오늘 침대 위에서 4B연필이 부러졌다". "무르고 한없이 부드러운" 4B연필은 글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데 더 유용하다.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잔 연필이 "침대가 왼쪽으로 기우뚱"하다가 시인의 머리를 찌르면서 부러졌다(그냥 몸의 무게에 눌려 부러졌을 수도 있다.). 연필이 부러지는 순간 시인은 과거로 여행을 떠난다. "칠월의 문턱에 와 닿던" 무렵, 부러진 "연필심 하나"에 "어린 가슴의 지붕이 내려앉았"던 그 시절로. 시인은 위의 시 '살구나무'처럼 의도적으로 "낙타표 문화연필"이라는 상품명을 등장시켜 시를 읽는 이들에게 "당신들도 이 물건 알고 있지?" 묻고 있다. 시인은 부러진 연필을 통해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슬픈 상상을 공유하려 한다.

"부러진 이 연필은 연필이 아니다" 이후 시는 급격히 상상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시인에게 연필은 단순히 한 자루의 연필이 아니라 '손끝-눈썹-지붕-유리창'이다. 손끝에서 시작된 연상은 유리창을 통해 밖으로 확장됐다가 다시 시인의 몸으로 돌아와 "손끝이 떨리고 눈썹이 뽑히고 지붕이 내려앉"는 충격이 된다. '지붕'은 어린 시절과 현재의 충격과 슬픔을 반영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시인은 상상이지만 "깨어진 유리창으로 날아"든 새를 통해 숨과 결을 되살린다. 이 순간부터 연필은 무생물에서 생물로 변화한다. 하여 부러진 "연필은 분명 연필이 아니"라 "어떤 짐승의 아름다운 얼굴이고 죽음"인 것이다. 시인은 연필에서 뚜벅뚜벅 사막을 걷는 낙타의 모습을 발견한다. 물론 이는 연필이 부러지는 것과 같은 시련이 닥치더라도 뚜벅뚜벅 시인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낙타들의 비명소리"는 시를 쓰는 고통일 것이고, "네가 부러진 연필의 이름"이라는 것은 너도 시인이라는 말과 다름없을 것이다.


어떻게 이다지 희고 고운 것들이
소리 없이 귓속에 쌓인 것일까
아무도 보지 못한 밤에 내린 눈
- '귀지' 전문

오래전에 새는 아주 따뜻한 것들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 '새' 전문

바람이 간 길을 가지 않으려고 촛불은 흔들리네
- '촛불' 전문

혁명채권을 사고 붉은 입술로 사인을 할까
나도 4월의 당원으로 가입하고 싶다
저 빗방울들의 한 표에 나를 더하고
너에게 오래도록 복무하고 싶다
- '봄비 2' 전문

둔치(屯癡). 사전에도 없는 이 말은 너무나 여리고 다정다감한 시인의 감성이 조금은 무뎌지고 무뎌져 강퍅한 세상에서 조금 덜 다치고, 조금 덜 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친구가 지어준 아호(雅號)란다. "당신이라는 눈물의 온도에/ 오랜만에 나의 몸이 새집처럼 흔들"('대한(大寒)')릴 수는 있겠지만, 내유외강의 시인은 "바람이 간 길을 가지 않으려고" 흔들리는 촛불처럼, "핏빛 노을 치받는/ 뿔 하나"('황혼 속 황소처럼 돌아온다')로 세상사에 물들지 않고 자기 길을 갈 것이다. 그 길에는 "별에 관한 지식을 늘어놓"('별')는 목동의 이야기와 "따뜻하고 몽글한 이야기들"('편도(扁桃)')과 "만질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것들"(이하 '징한 것')이 있다. "아리고, 저미고, 울멍울멍한 것들"의 행간을 만지다보면, '보일'이라는 몽상의 숲에 너무나 많은 시간이 고여 있음을 알게 된다.

◇살구나무 빵집=김보일 지음. 문학과행동 펴냄. 124쪽/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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