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조카의 방문으로 지친 두 다리를 이끌고 오랜만에 공원에 발을 들였다. 여기저기서 알록달록한 털을 감싼 토끼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토끼들이 늘어난 것 같다. '이 친구들 전부 어디서 온거지?'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위치한 '몽마르뜨 공원' 얘기다. 프랑스인이 많이 사는 서래마을 진입로에 위치하고 있어 '몽마르뜨'라는 이름이 붙은 이 고즈넉한 공원은 '토끼 공원'으로도 유명하다. 아침이나 늦은 밤에 공원을 찾으면 수십여 마리의 토끼를 볼 수 있어 멀리서도 방문하는 사람이 있다.
평화롭기만 할 것 같은 토끼 동산이 최근 시끄럽다. 갑자기 늘어난 토끼 개체 수에 공원이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 그 동안 토끼를 돌봐온 시민과 동물단체가 문제해결을 촉구하고 나섰지만 개선책이 마땅찮다. 이런 상황에서 고통받는 것은 토끼 뿐이다.
'토끼 공원'으로 유명세를 탔지만 그 시작은 썩 유쾌하지 않다. 이 곳에 토끼가 자리 잡은 것은 2011년 부터다. 시민들과 공원 관리인에 따르면 유기된 토끼 한 쌍이 번식을 시작했고 또 다른 토끼들이 공원에 버려지면서 무리를 이뤘다. '토끼 동산'은 무책임한 유기 행위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토끼들의 번식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암토끼는 두 개의 자궁을 가지고 있어 중복임신이 가능한데 임신 기간도 한 달 정도에 불과하다. 보통 한 번에 5~6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별 다른 회복 시간이 없어도 금새 또 임신할 수 있다.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몽마르뜨 공원과 그 일대는 수천 마리의 토끼로 발 디딜 틈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나선 토끼 애호가들과 동물권 단체가 비용을 들여 중성화수술(TNR)을 진행하는 등 관리에 힘써 15~20여 마리의 개체 수를 유지했다.
공원은 토끼 뿐 아니라 산책을 하는 사람과 반려견도 자주 찾는다. 길고양이도 많고 족제비도 있다. 토끼 개체가 늘어나니 반려견이나 야생동물에게 공격을 당하는 사고도 늘었다. 이 때문에 토끼를 풀어놓은 시민이 쥐약을 뿌려 이를 먹은 반려견이 목숨을 잃을 뻔 하는 등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대책 없는 대책
문제가 불거지자 관할 지자체인 서초구청도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서초구는 수토끼 중성화 수술과 공원 내 방사장을 조성해 보호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이같은 대책에 토끼 관리를 도맡았던 자원봉사자들과 동물권단체는 안일한 대책이라며 반발했다. 동물자유연대 측은 암수 모두를 중성화해야 하며, 특히 수 많은 토끼 개체를 방사장에 합사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겉으로는 순해 보이지만 영역 동물인 토끼가 좁은 공간에 모여 있게 되면 다툼이 심해 크게 다치거나 사망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이같은 문제를 인식한 시민자원봉사자와 동물자유연대, 동물권단체 '하이' 등은 지난달 서초구청과 면담을 통해 △유기행위에 대한 강력한 행정처분 △토끼 중성화 수술 진행 △공원 내 방사 를 제안했다. 단순히 좁은 방사장에 몰아 넣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동물자유연대는 직접 암토끼 중성화 수술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나섰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동물 유기 금지 캠페인까지 진행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사람과 토끼, 공존 모색해야
이같은 동물권단체의 제안과 시민자원봉사자들의 민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서초구는 아직 뚜렷한 답을 내놓고 있지 않다. 공원 이용객들의 불편과 유지·보수 문제를 거론하며 '토끼 개체수 감소' 입장만 견지하는 중이다. 민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대책은 아직 내부 검토 중이라고 답하고 있다.
동물권단체와 시민들은 구청의 소극적인 태도에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이들은 공원의 토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기 행위' 단속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 동물 유기 행위 적발·과태료 부과 등의 업무는 해당 지자체의 소관이다. 채일택 동물자유연대 팀장은 "중성화 수술을 하고 방사장에 토끼를 몰아 넣어도 누군가 또 토끼를 공원에 버리면 문제는 재발생한다"며 "이에 대한 서초구청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채 팀장은 이어 "토끼를 절대 건들지 말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이미 터를 잡고 야생화된 토끼가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존중하고 사람과 동물이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지적은 조은희 서초구청장의 구정 방향과 일치한다. 조 구청장은 지난 지방선거 과정에서 "동물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서초 실현은 주민 복지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며 "이같은 맥락에서 동물복지정책을 추진하려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저작권자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