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항정살 '사선 썰기'에 도전했다. 포 뜨듯 대각선으로 써는 거였다. 얇게, 한 번에 쓱 내렸다. 항정살 한 점이 생겼다. 정씨가 "너무 얇다, 이건 생선회가 아니라서 좀 두꺼워야 맛있다"고 알려줬다. 칼날을 좀 더 세우고 다시 잘랐다. 하면서도 "이렇게 하면 되느냐"고 계속 물었다. 그러자 또 다른 베테랑 이영우씨(25)가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 줬다. 한 덩이를 다 자르자 8~9점이 생겼다. 이를 스티로폼 포장용기에 담아 랩을 씌웠다. 고깃덩이가 '상품(商品)'이 되는 순간이었다. 진열대에 놓인 걸 보니, 자식을 떠나보낸 심경이었다.
4일 오전 9시, 경기 안산 상록구 사동 소재 한 정육점에 갔다. 아침부터 고기 먹겠다고 사러간 건 아녔다. 이날 하루는 손님이 아닌, 정육점 주인으로 갔다. 이젠 기자 못해먹겠다' 때려치고 정육점을 차린 건 아녔다(가끔 상상만). 정승환씨(36)가 운영하고, 이영우씨(25)가 함께하는 가게다. 이 곳에서 저녁 6시30분까지 일해보기로 했다.
정육점 취재를 위해 간 건 아녔다. 날 것 그대로의 '자영업 현실'이 궁금했다. 한해 음식점 10곳이 새로 생기면, 기간 내 폐업하는 곳이 9곳 이상(지난해 통계) 이라고 한다. 어제 오늘 일이 아녔지만, 요즘 더 힘들다 한다. 뉴스를 찾아보면 '비명', '벼랑 끝', '한숨', '눈물', '곡소리' 등이 제목에 줄줄이 나온다. 힘 빠지고, 절망적인 내용들 뿐이다.
통계가 못 드러낸, 자영업자들 삶은 어떨까 싶었다. 그 마음도. 언젠가 동네 식당에 갔을 때였다. 돈까스가 맛있어 자주 찾던 곳이었다. 주말 저녁 한창 붐빌 시간인데, 테이블이 대부분 텅 비어 있었다. 30대 후반이나 됐을 법한 주인은 그 중 하나에 앉았다. 그리고 문 쪽만 멍 하니 바라봤다.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체험 해봤음 싶었다. 그들 삶을 짐작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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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채를 썰다 '눈물'이 났다━
하루 전날 밤, 상상했던 정육점에서의 모습은 이랬다. 커다란 소를 번쩍 들어 쿵 하고 놓은 뒤 어마어마한 칼로 해체하는 것. 핏기 어린 땀방울을 흘리며 허브티 한 잔(커피 끊음) 마시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협지에서 보면 늘 그렇듯, 칼은 쉽게 쥘 수 없었다.
첫 임무는 '파씻기'였다. 삼겹살을 사는 손님들에 파채를 서비스로 주는데, 이를 위해 미리 손질 하는 게 필요했다. 파 끝 싱싱하지 못한 부분은 떼고, 흙 묻은 걸 물로 잘 씻는 거였다. 파는 직접 재배해 조달한다고 했다.
노랗거나 흐물흐물한 파 끝을 과감히 떼서 물로 빡빡 씻었다. 평소 갈고 닦은 설거지 실력이 도움 됐다. 파 씻는데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다 손질한 파를, 정씨가 다시 한 번 꼼꼼히 보며 다듬었다. 그는 "서비스지만, 가장 좋은 파채를 주고 싶다"고 했다.
'이걸 어떻게 다 썰지' 생각하고 있는데, 채 써는 기계가 있었다. 파가 통째로 쑥 들어가더니 파채로 썰려 떨어졌다. 100개 가까이 되는 파를 계속 내려보내자니, 매운 향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느 순간부터 눈물이 줄줄 났다. 자꾸 비벼 덜어내도, 왈칵왈칵 고였다. 이 상태로 밖에 나가 가을 바람을 맞고 있으니 처량했다. 다시 들어와 마무리한 뒤 적당량을 봉지에 담았다. 파채 하나도 쉽잖았다.
그 와중에도 정육점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모든 과정에 정성과 고민이 담겼다. 정씨와 이씨가 창고서 고기를 꺼내 보기 좋게 썰었다. 이를 랩에 싼 뒤 가지런히 진열해 놓고, 창고를 정리하며 재고를 체크했다. 칼 가는 소리와 도마 부딪치는 소리가 반복해 들렸다. 칼과 도마는 중간중간 계속해서 닦고, 바닥도 쉴 새 없이 쓸고 닦았다. 정씨는 "둘다 깨끗한 걸 좋아해서 그렇다"며 웃었다.
파채를 썬 뒤 고기를 랩에 싸는 일을 돕기로 했다. 요령이 있다고 했다. 검지와 중지에 랩을 끼운 뒤, 쭉 잡아당겨 엄지로 포장용기를 들어 올리며 빵빵하게 싸는 것. 시범을 보여줄 땐 쉬운 것 같았는데, 해보니 살짝 쭈글쭈글하게 됐다. 랩이 아까워 이를 내밀었더니 정씨가 북북 뜯고 다시 쌌다. 일순간 부끄러워졌다. 반복하니 조금씩 익숙해졌다.
가장 중요한 고기는 부위 별로 가져오는 업체가 다 달랐다. 가격과 품질을 고심해 정한다. 돼지는 통째로 들여와 직접 해체한다. 정씨는 "요즘은 그렇게 안하는 곳도 많은데, 이렇게 해야 고기가 싱싱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돼지 반 마리를 해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몸무게는 90kg, 가격은 30만원 남짓이라고 했다. 생각보다 엄청난 덩치에 접근할 엄두도 안 났다. 심지가 크고 날이 작은 '새김칼'을 든 정씨와 이씨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껍질이 벗겨지고 뼈가 빠지더니 부위 별로 차곡차곡 고기가 쌓여갔다. 다년간 아르바이트부터 자영업까지 잔뼈가 굵은 두 사람이었다. 일사불란한 모습이 웅장하고 치열하게 느껴졌다.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새발의 피'였다. 둔탁한 손이 귀한 고기를 망가뜨릴까 조심스러웠다. 찌개거리 정도만 퉁퉁 큼직하게 썰고, 포장하고, 양념 고기를 주물주물하며 맛있게 배게끔 재웠다. 틈틈이 청소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는 등 손을 덜 수 있게끔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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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한 명'이 그렇게 고마웠다━
이날 오전 9시30분, 첫 손님이 왔다. 양념 불고기용 고기를 사갔다. 판매 가격은 1만원 남짓. 가게에 서서 손님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하리만치 좋았다. 씩씩하고 큰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를 연신 외치게 됐다.
정육점에 머무는 시간이 늘고, 애정이 담길 수록 손님을 더 기다리게 됐다. 정씨는 "마(魔)의 목요일이라 불안하다"고 말했다. 그게 뭐냐 물으니, 목요일엔 유독 사람이 없다고 했다. 과거 요일별 매출을 보니, 목요일엔 평일 기준 60만원대까지 매출이 떨어질 만큼 부진한 편이었다. 통상 평일은 120만원, 주말엔 200만원 정도는 매출이 나와야 마진이 맞는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오전이 다 가도록 손님이 3~4명, 매출이 5만5000원에 그쳤다. 오후 4시까지도 손님이 10명, 매출 16만원 남짓이었다. 별 소용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바심이 났다. 자꾸 바깥에 나가 좌우를 두리번거리게 됐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자체가 없었다. 4차선 도로가 앞에, 아파트 단지가 인근에 있었지만, 별 소용 없는듯 했다. 정씨는 "대부분 맞벌이라 저녁되면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지난 4월 개점한 정육점도 처음엔 손님들이 몰렸다. 줄이 길게 늘어섰고, 진열대 등이 소고기 특수 부위들로 채워졌었다. 이씨는 "그럼에도 다 집어갈 만큼 장사가 잘 됐다"고 회상했다. 오픈 효과가 2개월 정도 이어진 뒤, 매출이 수직으로 꺾였다. 폭염 여파로 거리에 사람들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던 때였다. 주말 매출이 100만원이 안될 정도로 타격이 컸다. 특수 부위가 놓여 있던 자리를 국거리가 대신했다.
정씨와 이씨는 고되게 버텼다.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매일 13시간씩 일했다. 매주 쉬는 날이 하루 밖에 안됐고, 추석 연휴 때도 일했다. 인근 정육점만 세 곳, 경쟁도 치열했다. 정씨는 "자영업자들은 진짜 '존버(매우 버틴다는 뜻의 속어)' 할 수밖에 없다"며 "소비심리, 경기가 안 좋은 걸 어떻게 할 수도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다행히 9월부터는 다시 회복되는 추세다.
이씨는 "우리 가게 같은 경우는 사장님이 잘해서 사정이 좀 나은 편"이라며 "다른 정육점들은 정말 더 힘들다"고 말했다. 불과 1년 전과 비교해도 차이가 엄청 나다고 했다. 정씨는 "10년 전에는 정육점 몇 달만 하면 집 한 채를 산다고도 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미 옛말이 됐다. 정씨 정육점을 찾은 거래처 관계자도 "정육점 세 곳 중 한 곳은 망하고, 나머지는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힘든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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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골 20시간 우리고, 양념갈비 시식…치열한 생존기(記)━
살 길은 하나 뿐이다. 정씨는 "노력해서 경쟁력을 갖추는 것밖에 없다"며 "그렇지 않으면 도태된다. 그게 철칙"이라고 했다.
정육점 한쪽 벽에는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이란 글귀가 있었다.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이 남긴 말로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는 뜻이다. 사람을 남기는 장사를 하자는 취지로 붙였다. 그 옆 창고 문에는 맛집 프로그램에 '방영될 집'이라는 문구를 붙였다. 정씨는 "그러면서 한 번 더 웃고 친해지게 된다"고 했다. 유쾌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맘 먹으면 고되게,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직원 한 명을 더 썼다. 이유 역시 둘이 있어야 다양한 시도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인건비를 아끼기 보단, 경쟁력을 확보해 손님을 잡겠다는 전략이다.
가격은 다른 정육점들보다 다소 낮게 책정하고, 친절함을 무기로 갖췄다. 손님들이 오갈 때마다 싹싹하게 응대하며 말 거는 모습이었다. 삼겹살을 사가는 손님에겐 "어디 놀러가시느냐"고 말을 붙였고, 애 엄마에게는 "애가 예쁘다, 몇 살이나 됐느냐"며 친해졌다. 홀로 오가는 할머니와 말벗이 되주고, 아이가 오면 요쿠르트를 공짜로 준다.
가게는 오픈형으로 해 손님들을 맞기 좋게끔 했고, 진열은 대형마트처럼 보기 좋고 깔끔하게 했다. 양념을 한 갈비 등을 지나가는 이들이 시식할 수 있도록 권하기도 한다. 정씨와 이씨 모두 다년간 이 분야서 경험한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메뉴도 계속해 개발한다. 최근 야심차게 선보인 메뉴는 '사골 국물'이다. 20시간 우려낸 뒤 판매하겠단 계획을 세웠다. 도로로 퍼지는 고소한 냄새에 손님들이 "이게 무슨 냄새냐"며 관심을 보였다. 이틀째였던 4일, 이미 국물이 뽀얗게 우러 났음에도 판매를 미루겠다고 했다. 맛을 본 정씨가 "아직 고소한 맛이 부족하다"며 "새로운 뼈를 더 집어 넣어야 겠다"고 해서다.
비용도 줄였다. 처음엔 두 사람 식비로 한 달 80만원 정도를 쓰다가, 지금은 직접 밥을 해 먹는다. 그렇게 식비 60만원을 아꼈다. 고기를 손질한 뒤 팔긴 애매한 부위를 모아놨다가 점심으로 먹는다. 정씨는 이날도 "그동안 못 먹어봤던 맛일 것"이라 장담하며 고추장 찌개를 끓였다. 옆에서 돼지갈비도 구웠다. 밥맛이 정말 '꿀맛'이었다. 최근 몇 달간 먹은 점심 중 가장 맛있었다.
자영업만 40년 가까이 했다는 인근 분식점 주인(63)도 이들과 비슷한 이야길 했다. "아무나 섣불리 자영업에 뛰어들었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동안 자영업 업종만 5번을 바꿨다고 했다. 인테리어·과일·족발 등 종류도 다양했다. 빚을 지기도 하고, 장사가 크게 잘되기도 했다. 그는 "뼈 아픈 교훈을 얻은 것 같다"며 "뭘 하든 계속 고민하고 경쟁력을 갖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제는 뭘 해도 버틸 자신이 생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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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쓰다듬던 정육점 주인의 '손'━
칼질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다가, 정씨의 묵직해보이고 두터운 손이 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었다. 칼질을 하다, 혹은 기계를 쓰다 이래저래 생긴 '영광의 훈장'들이다. 정씨는 "작은 상처가 나면 '아야' 하는데, 큰 상처가 나서 피가 줄줄 나면 더 놀라서 '이게 뭐지?' 이러고 만다"며 웃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씨 손은 더했다. 큰 흉터들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이씨는 "기계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가 크게 다쳤다"며 "바깥 쪽은 다 아물었는데, 안쪽은 아직 덜 아물어 손이 꽉 오므려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나마 신경은 안 다쳐서 다행"이라고 했다.
이날 오후 2시쯤, 정씨 아내와 아들 '시온'이가 찾아왔다. 시온이는 다음주면 첫 돌을 맞는다. "사장님을 꼭 닮았다"고 하자 정씨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런 뒤 아들을 안아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아기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어 큰 손으로 아들 머리를 쓰다 듬었다. 생계와 가족 행복을 책임지는, 아름다운 손이었다. "어깨가 무겁겠다"고 하자 정씨는 "아내가 더 고생이 많다"고 했다.
밤 10시까지 올린 이날 하루 매출은 81만2300원, 총 51명이 다녀갔다. 그나마 저녁에 손님이 몰렸지만, 매출 100만원을 넘기지 못했다. 온갖 노고에도 어쩔 수 없는 불경기 한파였다. 이씨는 "해외여행도 많이 간다는데, 손님들이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며 외마디 한숨을 쉬기도 했다. 정씨와 이씨는 "앞으로 인근 고깃집 등 식당들에 질좋은 '도매용 고기'도 납품해 매출을 올리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에필로그(epilogue). 집에 오던 길, 엘리베이터에 동네 피자집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며칠 전부터 있었는데, 새삼 눈에 들어왔다. '지저분하게 이런 걸 붙여 놓느냐'며 투덜거렸던 기억이 났다. 메뉴를 살펴보다,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집 현관문 손잡이엔 자그마한 '열쇠가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평소엔 기를 쓰고 뗐었다. 그대로 두고 집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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