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 국사가 가르쳐준 한국사 최고의 명당은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 2018.10.06 07:52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93 – 도선 : 한국 풍수의 실질적 창시자

영화 '명당' 포스터

“완만한 주작이 북소리처럼 일어나고, 현무의 드리운 머리가 두 물줄기 사이에 있구나. 청룡이 편안하게 퍼지며 머리를 높이 일으키고, 백호는 천천히 가니 해치려 하지 않네.”

길지(吉地), 즉 상서로운 땅을 읊은 한시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의 한 구절이다. 통일신라 말기의 선승이자 풍수 대가였던 도선 국사가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확실치는 않다. 도선에 대한 기록은 나중에 꾸며진 기이한 설화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앞세운 한국 풍수는 고려와 조선을 거쳐 아직도 뭇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풍수(風水)는 원래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로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삶의 터전에 적용된다. 외풍을 막아주는 산을 등지고 식수와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하천이 가까운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은 그래서 살기 좋은 곳이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풍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권력과 부귀영화가 움트는 명당으로 귀결된다.

영화 ‘명당’을 보면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멀쩡한 절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이야기는 황현이 지은 구한말 역사서 ‘매천야록’에도 전한다. 명당을 차지하려고 저지른 이 무리수 덕분에 아들을 고종 임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디 왕실만 그런가? 조선시대 양반네들은 앞에선 미신이라 하여 풍수를 배척했지만 뒤로는 집터와 묏자리를 찾아 헤맸다. 영화 속 세도가처럼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었다. 유교국가의 지배층이 공자님이 멀리 한 ‘괴력난신(怪力亂神)’에 휘둘린 셈이다.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이게 다 도선 탓일지도 모른다. 그가 송악, 곧 오늘날 개성의 어느 집 앞에서 성인의 탄생을 예언하지 않았다면, 혹은 그 예언대로 고려를 건국하고 삼한을 다시 통합한 왕건이 나오지 않았다면, 후손들이 이렇게까지 풍수에 매달렸을까.

도선에 관한 기록 가운데 그나마 신빙성 있는 것은 1150년 고려 의종 때 최유청이 지은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이다. 이 비문에 따르면 그는 본시 선(禪)으로 일가를 이룬 고승이었다. 광양 옥룡사에 오랫동안 거처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신라 헌강왕이 흠모한 나머지 궁으로 불러들여 직접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도선이 풍수에 몰입한 시기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던 청년기였다. 원래 선승은 계율을 받으면 이 산 저 산 옮겨 다니며 수행에 나선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산천의 형세에 관심을 갖고 풍수에 눈을 뜨는 일이 많았다.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중국도 선승이 풍수설을 퍼뜨리는 게 다반사였다. 풍수는 ‘방랑수행’의 부산물이었다.

도선은 산천의 형세에 음양오행을 접목해 비결들을 터득해 나갔다. 여기에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사회상도 반영했다. 그가 활동하던 9세기 중엽에는 신라 왕실이 사실상 무너지고 지방에서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고 있었다. 도선은 그것을 ‘지기쇠왕설’에 담았다. 땅의 기운이 시간이 흐르면서 왕성해지거나 쇠퇴한다는 것이다.

난세에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고자 ‘비보사탑설’도 제시했다. 자신이 점찍은 곳에 절이나 탑을 지으면 땅의 기운을 보완해 나라와 백성을 지켜준다는 도선의 풍수설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 설을 유훈으로 삼아 ‘훈요십조’에 남기기도 했다.

“여러 사원은 모두 도선이 산수(山水)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쳐서 정한 곳 외에 함부로 창건하는 일이 있게 되면 지덕(地德)을 손상시켜 왕업이 오래가지 못하리라’ 하였다.”

왕건의 유훈은 고려시대에 ‘도선비기’가 인기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인종은 도선에게 ‘선각국사’를 추증했고, 의종 때는 그의 비석까지 건립했다. 선승이었기 때문에 해준 게 아니다. 고려 창업에 지대한 공을 세운 한국 풍수의 실질적 창시자를 추켜세운 것이다.

‘도선비기’는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그 내용은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다. 혈(穴)과 사신사(四神砂)가 대표적이다. 혈은 땅의 기운이 모여 있는 곳이고, 사신사는 혈을 수호하는 사방의 산을 말한다. 중요한 건물을 지으려면 이 혈과 사신사를 살피는 게 필수였다고 한다.

그럼 명당은 어떠해야 할까? 혈을 중심으로 뒤쪽의 현무는 주산이며 우뚝 솟아야 한다. 그 주위론 명당수가 양 갈래로 흐르는 것이 좋다. 앞쪽의 주작은 안산으로 완만해야 한다. 왼쪽의 청룡(좌청룡)과 오른쪽의 백호(우백호)는 혈을 거역하지 않고 감싸 안는 형상이 바람직하다.

이것이 도선이 가르쳐준 명당의 기본 조건이다. 옛 사람들은 그런 명당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명당에 집터와 묏자리를 써야 후손들이 잘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국사 최고의 명당들도 큰 틀에서 보면 도선의 풍수설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역사가 주목하는 집터와 묏자리

먼저 조선시대 한양 도성과 경복궁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집터다. 1394년 10월 태조 이성계는 마침내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이때 창업의 근거지를 닦고 새로운 궁궐을 세우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 무학대사와 정도전이었다.

무학대사는 북악, 인왕산, 낙산, 남산으로 둘러싸이고 산에서 흘러내린 냇물이 청계천을 이루는 길지를 찾아냈다. 도선의 풍수설에 비춰볼 때 새 왕조의 심장부로 안성맞춤이었다. 도성과 궁궐의 설계는 정도전이 맡았다. 그는 현무인 주산을 북악으로 삼고, 주작 곧 안산을 남산으로 정했다. 자연스레 좌청룡은 낙산, 우백호는 인왕산이 되었다.

그런데 정도전의 방위를 무학대사가 반대하고 나섰다. 풍수에서는 좌청룡이 맏아들을 상징하는 산인데 낙산은 산세도 미약하고 아버지 격인 주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장차 왕실의 장남들에게 화가 닥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 대신 그는 인왕산을 주산, 북악을 좌청룡으로 삼자고 건의했다. 둘 다 산세가 수려한데다 서로 가까워서 임금과 세자의 위엄이 서고 화목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개국 일등공신 정도전은, 불교를 배척해온 이 유학자는 한낱 ‘땡초’에게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유교경전을 신봉했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궁궐은 정남쪽을 바라봐야 한다. 무학대사의 말대로 지으면 동남쪽을 향하게 되는데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도성과 궁궐은 정도전의 안대로 만들어졌다.

그래서일까? 우연인지 필연인지 조선왕조 500년 역사는 적장자 수난의 연속이었다. 총 27명의 임금 가운데 본부인의 맏아들, 즉 적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것은 8명뿐이었다. 그나마 임금 노릇 제대로 한 인물은 현종과 숙종 단 둘이었다. 유교국가의 적장자 상속 원칙이 무너지면서 조선은 끊임없이 정변에 시달려야 했다.

결과적으로 한양 도성과 경복궁은 하늘이 점찍은 집터였지만 옥에 티랄까, 방위를 잘못 정하는 바람에 우환을 불러들였다고 볼 수 있다. 믿거나 말거나.

그렇다면 죽은 자의 안식처, 묏자리 가운데 역사가 흥미로운 명당은 어떤 곳이 있을까? 수많은 왕릉들을 제치고 한 후궁의 묏자리를 거론해야겠다. 바로 조선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가 묻힌 ‘동작릉(銅雀陵)’이다. 평범한 백성의 딸로 태어난 여인, 살아생전 종3품 숙용에 그친 그녀의 무덤이 왕과 왕비처럼 ‘능(陵)’이라고 불린 까닭은 무엇일까?

9살에 궁녀로 들어간 안씨는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에게 총애를 받고 후궁이 되었다. 중종도 마음에 들어 했다. 미모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정숙한 태도 덕분에 점수를 땄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이 임금의 후궁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 사극 ‘여인천하’에서 조명했듯이 악명 높은 궁중암투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폭군 연산의 처조카라는 이유로 내쳐진 조강지처 단경왕후, 원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숨진 계비 장경왕후, 사극에서 “뭬이야”를 외치다가 누명을 쓰고 죽은 경빈 박씨, 훈구파의 사주로 조광조와 사림 제거에 앞장선 희빈 홍씨, 그리고 ‘여인천하’를 평정하고 치맛바람을 일으킨 문정왕후까지…. 사연 많고 욕심 많은 여인들이 궁중에 가득했다.

기댈 언덕이 없었던 안씨는 자세를 낮추고 모나지 않게 처신했다. ‘사회생활’ 잘한 덕분에 그녀는 문정왕후에게 인정받고 중종 사후에도 궁궐에 머물렀다. 안씨는 1549년에 죽었지만 그 자손들은 계속 왕실의 보살핌을 받았다.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2년 후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위는 안씨의 손자 하성군에게 돌아갔다. 그가 조선 14대 임금 선조다.

무명의 후궁 안씨는 선조 이후 모든 조선왕들의 할머니가 되었다. 그 모진 ‘여인천하’를 겪고 최후에 웃은 것이다. 내명부 품계도 종3품 숙용에서 정승 반열인 정1품 창빈으로 격상되었다. 그런데 이 대반전을 이끌어낸 비결이 묏자리라는 설이 있다.

창빈 안씨의 묘는 원래 장흥에 있었는데 아들 덕흥군이 동작나루 위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곳은 동작봉이 공작의 날개를 펴고 내려앉은 명당이다. 좌우로 능선이 병풍을 치듯 묘역을 감싸고 앞쪽에는 한강이 유유히 흐른다. 이런 명당을 차지하는 바람에 임금 후손들이 쏟아져 나오고, 일개 후궁의 무덤이 (비공식적이지만) ‘능’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오늘날 동작릉은 국립현충원 경내에 자리 잡고 있다. 그 곁에는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호국영령들이 함께 한다. 세월을 뛰어넘어 한국사 최고의 명당으로 손색이 없다. 뒤집어 보면 명당이라고 하여 반드시 풍수설에 좌우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산 자의 집이든, 죽은 자의 집이든 아름다운 사람이 거처하면 상서롭고 길한 기운이 풍겨 나오는 법이니….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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