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 편지]마르딘에서 만난 당나귀 청소원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 2018.09.15 08:34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멀리서 바라본 마르딘 구시가지.

남동부 아나톨리아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도시 마르딘(MARDiN). 터키를 찾는 한국인들은 거의 방문하지 않는 도시지만, 나는 이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긴다. 사전지식 없이 만나는 역사의 현장에서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당황하는 순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르딘에서 시작하는 첫 아침. 다른 도시를 찾아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구시가지’를 찾아갔다. 어느 도시든 오래된 시가지는 있게 마련이고, 그곳에 가면 마치 보물창고를 뒤지는 것처럼 다양한 시간의 자취들을 만나게 된다. 마르딘의 구시가지는 해발 1,000m의 산기슭을 따라 세워진 집단 주거지다. 일부러 멀리 떨어진 곳으로 물러나서 빽빽하게 들어선 집들을 바라본다. 엄청나게 큰 산 하나가 통째로 사람들에게 거처를 내줬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맨 꼭대기에는 성채가 우뚝 서 있다. 전형적인 방어형 주거지. 산 아래로는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활한 메소포타미아 평원이 펼쳐져 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봐도 푸른 초원만 눈에 찰 뿐이다.

마르딘은 마르딘 주의 주도(州都)로, 아나톨리아반도에서 비교적 남쪽에 위치한 하산케이프에서도 한참 더 남쪽으로 내려온다. 어느 정도 끝인가 하면 시리아 국경과 2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아랍족이 많이 살고 투르크족, 쿠르드족, 아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뒤섞인 복잡한 인적 구성을 보인다.

끝없이 펼쳐진 메소포타미아 평원.

또 종교의 산실로도 유명한데시리아 정교회의 총본부가 1932년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로 이전하기 전까지 중심역할을 했다. 그밖에도 아르메니아 정교회, 예지디교, 조로아스터교 등 여러 고대종교가 둥지를 틀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상업도시로도 이름을 날렸다. 아나톨리아 고원과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연결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아랍과 페르시아에서 출발한 대상들이 이곳을 거쳐 아나톨리아로 들어섰다.

이제 마르딘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볼 차례. 구시가지의 명물은 누가 뭐래도 원형이 잘 보존된 산동네 골목길이다. 하지만 골목길로 들어서기 전에 반가운 풍경부터 만났다. 바로 당나귀 청소원. 조금 딱딱해 보이는 역사적 유물보다 이렇게 살아있는 풍경을 만날 때 여행이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당나귀의 양 옆으로 두 개의 나무상자와 마대자루가 매달려 있다. 물론 그곳에는 각종 쓰레기가 가득 들어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건 없다. 청소차 대신 생활쓰레기를 나르는 당나귀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나귀 청소원.


1960년경 마르딘 전체를 문화보호구역으로 지정하면서 도시 안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골목은 가파르고 좁아서 차가 들어갈 수가 없다. ‘압바라’라고 부르는 석조 건축물들이 골목과 골목을 미로처럼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청소를 안 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동원된 것이 당나귀다. 약 40마리의 당나귀가 청소에 동원되는데 이들은 시청에 소속돼 있는 ‘공무원’이다.


당나귀 뒤를 따라 골목 탐색에 나섰다. 집들은 요새처럼 높게 담을 쌓았고 골목은 사람 한두 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다. 집들을 이렇게 높고 튼튼하게 지은 것은 적들의 침입에 대비해 도시 전체를 요새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골목도 가능한 한 좁게 만들었다. 어떤 세력도 영원히 이 도시를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격을 하던 쪽이 방어하는 쪽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는 일도 빈번했을 것이다. 집은 아랍풍의 건축물들이 많다. 어떤 과정을 거쳤든, 이곳을 누가 차지했든 이제는 그저 이야기로 남아 떠돌아다닐 뿐이다. 여행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 덕분에 아름답고 튼튼하고 은밀한 골목길을 걸어볼 수 있다는 것.

여기저기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또 다른 당나귀 청소원을 만났다. 이 아저씨는 나를 보자마자 뭔가 보여주지 못해서 안달이다. 우선 당나귀의 재주를 선보인다. 아저씨가 멀리 떨어져서 “서!” 하면 신통하게도 바로 선다. 물론 “가!” 한마디가 떨어지면 뚜벅뚜벅 걸어간다. 거참, 말 안 듣는 사람보다 훨씬 낫네. 내가 재미있어하자 아저씨는 신이 나서 계속 “서”와 “가”를 반복한다. 아저씨와 당나귀가 골목으로 사라지자마자 이번엔 행상을 하는 당나귀가 나타난다. 커다란 자루에 각종 채소를 담아서 팔러 다닌다. 자루를 들여다보니 감자, 파, 시금치 등 온갖 채소가 들어있다. 우리로 치면 트럭행상인 셈이다.

골목 끝에는 쓰레기 집하장과 당나귀들의 집이 있다. 쓰레기를 내려놓은 당나귀들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쉬고 있다. 그런데 건물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이런! 역시 문화재급 건축물이다. 하긴 서 있는 모든 것들이 ‘고대’ 두 글자와 멀지 않으니 당나귀 집 아니라 무엇으론들 못 쓰랴. 청소원들은 여기서 퇴근을 한다. 아침 일찍 나와 청소를 하고 열시에 퇴근한 뒤 오후에 다시 나온단다.


성채처럼 높고 튼튼하게 지은 마르딘 구시가지의 집들.


퇴근하는 청소원 아저씨들을 붙잡고 손짓발짓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 사는 모습을 보고 듣는 것만큼 즐거운 여행이 어디 있으랴. 그날 내가 본 거라고는 성채처럼 높게 담을 올린 집들과 좁은 골목, 그리고 당나귀 청소원이 전부였지만 로마 유적지를 거닌 것보다 훨씬 더 뿌듯했다. 여행의 진짜 보물은 시장이나 골목길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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