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국가는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다"

머니투데이 이재은 기자 | 2018.09.03 06:05

[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②] 중국계 80% 화교국가 싱가포르, 특유의 성정 억제해야한다며 독재 통치

싱가포르 전경 /사진=위키커먼스
싱가포르를 비롯 동남아권 친구들은 약속이 있으면 본인 친구나 친구의 친구를 데리고 오는 일이 잦았다. 함께 쇼핑이나 식사, 혹은 페스티벌을 가기로 한 약속이 있으면 세 명에 불과했던 당초의 약속인원은 금세 10명이 넘는 대인원으로 늘곤 했다. '내 친구가 곧 너의 친구'이며 '여러 명이 함께 하면 더 즐겁다'는 인식 때문이었는데 덕택에 많은 수의 싱가포르인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중국계였는데, 간혹 말레이계 친구나 인도계 친구가 올 때는 습관처럼 이들이 먹지 않는 재료(돼지고기·소고기 등)를 빼고 식사를 주문했다. 싱가포르가 중국계 74.3% 말레이계 13.3% 인도계 9.1% 기타 3.3%로 구성된 다인종국가인 만큼, 다문화에 익숙한 듯 보였다. 그만큼 치킨 라이스는 좋은 선택지였다.(☞싱가포르판 '김치 논쟁'?… "치킨라이스는 내거야" [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①] 참고)

그런데 중국계 싱가포르인 친구들은 나와 중국계들끼리만 있을 때, 즉 아주 친밀하게 비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중국계와 한국인은 성실하다' 등 신체적 특징이나 성향을 두고 '어떤 민족은 어떠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했다. 그럴 때마다 싱가포르에서 인종을 다루는 방식은 미국·캐나다·호주 등에서 인종을 매우 민감하게 취급해 일상에서 언급을 자제하는 방식과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인스턴트 아시아 싱가포르'는 싱가포르 관광청이 사용한 첫 슬로건이었다. '멜팅폿' 싱가포르에서 아시아의 모든 문화, 음식을 한번에 즐길 수 있다는 의미였다. /사진=레딧 캡처
나중에 알게된 것이지만 이는 싱가포르가 다인종을 다루는 방식이 다른 나라와 다른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싱가포르는 인종을 숨기는 게(동화주의) 아니라 드러내는 방식(다인종주의)으로 다문화를 구현, 인종과 민족을 사회적 분류의 한 수단으로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전략을 채택했다. 즉 싱가포르는 1965년 8월 신생 독립국으로 출범하면서 '아시아의 멜팅폿'(melting pot·인종 문화 등 여러 요소가 하나로 융합 동화되는 현상)을 국가 정체성으로 삼았다. 다양한 민족 정체성은 아시아에서 싱가포르 만이 가진 유일무이한 특질이 됐고 오히려 사회통합의 자원으로 등극했다. '멜팅폿' 싱가포르의 공용어는 영어·중국어·말레이어·타밀어(인도) 4개이며 모든 국민은 기본어 영어와 모어(중국어·말레이어·타밀어 등) 등 최소 2가지 언어를 구사한다.

'다인종주의 멜팅폿' 싱가포르에서는 국가가 진행한 모든 곳에 인종이 중요 요소로 등장한다. 신분증과 주택이 그 예다. 1954년부터 도입된 신분증에는 인종기록이 명시돼있다. 또 싱가포르 HDB(주택개발국·Housing Development Bureau)가 임대하는 주택(23개 지역 국유지에 88만호를 지어 99년간 장기임대)에는 인종 할당이 있다. 그 구성비는 철저히 지켜지는데, 예컨대 중국계가 나온 집에는 중국계만 들어갈 수 있고, 말레이계가 나온 집에는 말레이계만 들어갈 수 있다. 싱가포르 정부가 임대 주택에서 인종 구성비를 지키도록 한 것은 과거 영국 식민지 하 구도심에 몰려있던 인종별 집단 거주지가 유지될 경우 같은 인종끼리만 뭉치는 걸 우려, 새로 지은 주택에 분산 배치해 여러 인종이 섞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인종은 더욱 실체적인 무엇으로 인식됐다. 싱가포르 전문가 김성건은 '싱가포르의 인종과 민족문제'에서 싱가포르인들은 인종을 현실적으로 뚜렷하고 객관적 양상을 갖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 인종을 매우 의식해서 '인종'을 계급, 나이, 교육적 성취보다 중요한 요소로 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 초대 수상 리콴유 장례식. /AFPBBNews=뉴스1
싱가포르 초대 수상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리콴유(李光曜·1959~1990년 총리, 1990~2004년 선임장관, 2004~2011년 내각고문)를 비롯 싱가포르 정치지도자들도 인종·민족을 국가 운영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무엇으로 인식했다. 리콴유는 1994년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미국의 정치외교 전문 매체) 편집인과의 인터뷰 '문화는 숙명이다'(Culture is Destiny)에서 "세계각국의 민주화 전망에 대한 최근 세계은행의 결론은 미국문화의 일부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같다'는 잘못된 가정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같지 않다, 유전자와 역사는 만난다"면서 문화와 생물학 간에는 긴밀한 연관성이 있으며, 민족과 인종의 특질은 바뀌지 않는 것으로 유전자가 행동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중국 하이난에서 유래한 음식 치킨라이스가 싱가포르 국민음식으로 거듭날 만큼 싱가포르에는 중국계가 많다. 리콴유는 중국계가 대다수인 싱가포르를 강국으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중국인 특유의 성정과 나쁜 습관을 규제해야한다고 여겼다. 리콴유는 이에 껌 씹기, 식당에서 입 닦은 휴지를 내버려 두고 일어서기, 거리에 침 뱉기 등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규제했다. 범죄는 태형으로 다스렸고, 사형도 흔하게 집행했다. 다른 나라에선 가장 혼란스러운 곳으로 꼽히는 차이나타운이, '경찰국가' 싱가포르에선 커다란 위생등급표가 달려있는 깨끗한 곳으로 거듭났다.

리콴유는 국가를 강국으로 이끌기 위해선 이 같은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독재도 나쁜 것으로 보지 않았다. 리콴유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나눴던 대화는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박 전 대통령 암살이 있기 일주일 전인 1979년 10월, 리콴유는 박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청와대에서 열린 환영 만찬회에서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의 관심과 정력을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데 소모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지도자는 오직 일하는 데만 정력을 집중하고 평가는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 박 전 대통령이 언론의 평가 등 눈 앞의 현실에만 집착하는 사람이었다면 대한민국의 이 같은 놀라운 성장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 싱가포르의 국부격인 리콴유 전 총리는 2015년 3월23일 새벽 향년 91세로 타계했다. 사진은 그가 1968년 1월13일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후 기자회견하고 있는 모습이다./사진=뉴시스
싱가포르 국회는 일당 독재로 국회의원 89석 중 83명은 리콴유의 자치정부 수립부터 59년째 집권 중인 여당 인민행동당(PAP) 소속이다. 여당은 야당에 대해 죄를 추궁하고 벌금을 물려 파산을 유도하거나 추방, 망명을 떠나게 한다. 리콴유의 정적으로 꼽혔던 조슈아 벤자민 제야레트남도 보다 큰 자유를 요구하다가 리콴유와의 법정 싸움 끝에 배상금을 지불하지 못해 파산했다. 정부를 비판한 언론도 명예훼손이나 국가 기밀 유출, 안보 위협 등의 죄목으로 고소당한다.

리콴유는 평생 한 개의 작은 빨간 가방(Red Box·외국 정상과 주고받은 편지, 각종 정책에 대한 구상과 서류, 회의 녹음 테이프·메모 등이 들어있는 가방으로, 리콴유 사후 국가유산으로 등재)을 곁에 가지고 다녔을 정도로 청렴하고, 국가를 강국으로 키워내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에 대해선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줄곧 유지했다. 앞서 언급한 '문화는 숙명이다'라는 제목의 인터뷰에서 그는 "외국의 제도가 적용될 수 없는 곳에 무차별적으로 강요하지 말라"며 "아시아와 서구 유럽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서구 개념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아시아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포린어페어에 '문화는 숙명인가?'라는 제목의 기고글을 보내 반박해 학계를 중심으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리콴유 전 총리는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과도 만남을 가졌었다. 사진은 1999년 10월 22일 김대중 대통령 리콴유 전 싱가포르 수상 접견 모습. /사진=한국정책방송원 제공, 뉴시스
김 전 대통령은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가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웠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로크의 이론보다 2000년 앞서 중국 철학자 맹자는 비슷한 사상을 설파했다"면서 "맹자의 왕도정치는 '왕은 하늘의 아들로서 좋은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는 임무를 하늘로부터 위임 받았다. 왕이 악정을 하면 국민은 하늘의 이름으로 봉기하여 왕을 권자에서 몰아낼 권리가 있다'고 설명한다. 또 한국의 토착신앙 동학은 '인간이 곧 하늘'이며 '사람을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고 가르친다. 동학정신은 1894년에, 봉건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착취에 대항해 약 50만 농민들이 봉기를 하도록 동기를 제공했다. 유교와 동학의 가르침보다 민주주의에 근본적인 사상이 어디에 있는가. 따라서 아시아적 가치가 민주주의에 맞지 않는다는 리콴유의 말은 옳지 않다"고 반박했다.

또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는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 가치를 지닌 개념이다. 민주주의가 없는 자본주의는 결국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면서 프러시아 독일과 메이지 일본,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를 사례로 들었다. 그러면서 "반대로 민주적 자본주의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실천한 국가들은 비록 일시적 어려움은 있었지만 모두 다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지적처럼 민주주의가 없는 싱가포르는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될까? 현재 싱가포르는 이제 세계경제포럼(WEF) 선정 인프라부문 경쟁력 2위 국가(2016~2017년), 1인당 명목 GDP 세계 9위 국가(2018년 IMF 발표), 국제투명성기구 선정 국가청렴도 순위 7위 국가(2016년), 보아오 포럼 선정 아시아 경쟁력 1위 국가(2017년), 국제협회연합 선정 국제회의 개최 1위 국가(877건·2017년)로 자리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지적이 현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싱가포르 젊은이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건 확실하다. 싱가포르 정치블로거 로이 응어잉(34)은 리셴룽 총리(李顯龍·리콴유 아들, 2004년부터 싱가포르 총리)의 국민연금제도(CPF)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정부로부터 고소를 당해 명예훼손 혐의로 40만 싱가포르 달러(약 3억2600만원) 벌금형을 받았다. 유튜버 아모스 이 팡 상(19)은 2015년 3월 유튜브에 리콴유를 조롱하는 영상을 올렸다가 실형을 산 뒤 2016년 12월 미국으로 망명 신청했다. 키쇼어 마흐부바니마흐부바니(Kishore Mahbubani) 전 싱가포르 유엔대사는 뉴욕타임스(NYT)에 "젊은이들은 사회 정치 경제 이슈 전반에 걸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길 원한다. 싱가포르는 변곡점에 서있다"고 말했다. 포스트 리콴유 시대, 앞으로의 싱가포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참고문헌
아시아 세기의 도래와 아시아적 가치, 아시아연구, 김성건
싱가포르의 인종과 민족문제, 지역연구, 김성건
싱가포르 역사 다이제스트100, 가람기획, 강승문
싱가포르에 길을 묻다, 매경출판, 강승문
유리벽 안에서 행복한 나라, 리수, 이순미
싱가포르 화교 회당공사의 사회적 영향력 고찰-19세기를 중심으로, 중국학연구회, 조원일
19세기 싱가포르 지역의 화교 조직 연구, 인문학연구, 조원일·김종규

☞[이재은의 그 나라, 페루 그리고 박근혜 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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