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판 '김치 논쟁'?… "치킨라이스는 내거야"

머니투데이 이재은 기자 | 2018.08.27 05:07

[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①]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강제 독립당한 싱가포르… 화교가 80%인 다인종 국가

편집자주 |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치킨 라이스 /사진=파파리치 호주 인스타그램
여유를 즐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 언제나 음식이다. 떡볶이, 알탕, 제육볶음, 김치찌개…. 문턱이 닳도록 한식당을 찾아다니던 내게 싱가포르인 친구들은 한식에만 국한하지 말고 음식 저변을 좀 넓혀보라며 자국 음식 '치킨 라이스'를 파는 곳으로 데려갔다.

치킨라이스는 하얗게 삶아낸 닭고기에 데친 숙주, 밥, 그리고 국물이 나오는 일종의 정식이다. 평범한 겉모습처럼 맛도 그저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한 입 먹자마자 의심은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육즙이 가득한 닭고기에 데친 숙주를 올리고 알싸한 고추소스와 간장을 찍어 먹으니 입에서 살살 녹았다. 닭고기 식감이 사라지기 전 서둘러 판단잎·생강 향이 가득한 밥을 입에 밀어 넣고, 거기에 삼계탕 국물처럼 걸죽한 닭국물까지 머금으니 맛이 가히 환상적이었다.

이후 우울할 때마다 싱가포르인 친구들이 알려준 '파파리치'(치킨라이스 전문 프랜차이즈, 동남아시아·호주·뉴질랜드 등지에 여러 지점이 있다)를 찾았고, 타국 친구들을 만날 때도 '파파리치'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러던 어느날 말레이시아인 친구들과 만나 저녁 식사한 날의 일이다. 어디서 저녁을 먹을까 이야기하다가 내가 '파파리치'를 가자고 말하니 친구들이 화색을 보이며 "너도 말레이시아 음식을 좋아하는구나?"라고 묻는 게 아닌가.
파파리치 호주 홈페이지
내가 "싱가포르 음식 아니었어?"라고 말하자 깜짝 놀란 표정의 친구들이 "말레이시아-싱가포르 관계는 복잡해"라고 말한 뒤 "분명히 하자면 '치킨 라이스'는 말레이시아 음식이야"라고 답하는 것이다. 식사는 맛있게 했지만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귀가 길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파파리치' 공식 홈페이지를 들어갔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 정말 '말레이시아 음식점'(Malaysian Delights)이라고 써있었다. '그렇다면 싱가포르 친구들은 왜 그렇게 설명한거지?'하는 생각이 들어 '치킨라이스'를 검색해보니 대부분의 웹사이트는 '싱가포르 음식으로 말레이시아를 비롯 동남아 국가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 어느 쪽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혼란이 가중됐다.

처음엔 그냥 인접국끼리의 음식 원조 논란인가 싶었지만, 보다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싱가포르 국가의 탄생과 발전 양상을 살펴보면 중국 남부 하이난성에서 유래한 치킨라이스가 왜 싱가포르의 대표적 음식으로 거듭나게 됐는지(치킨라이스의 영어 이름도 하이난성의 이름을 딴 하이난니즈 치킨라이스(Hainanese chicken rice)다), 그리고 말레이시아가 왜 '우리 것'이라고 분노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싱가포르는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 관심 밖 버려진 섬으로, 극소수의 말레이족(원주민, Bumiptra·부미뿌트라)만 살던 해적들의 은거지였다. 하지만 1819년 이 곳의 위치적 중요성을 파악한 영국 동인도 회사가 현 싱가포르 남부에 항구를 개발하고 동방무역 거점으로 키우면서 서서히 사람이 몰려들었다. 1858년부터는 영국 인도 캘커타 본부가 이 지역을 지배했고, 싱가포르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인도 총독 행정력 부족 등의 이유로 1867년 정식으로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됐다. 이후 싱가포르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말레이시아와 통합된 채 영국 식민지배하에 있었다. 즉,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가 두 나라로 갈라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지도. 현재 말레이시아의 영토는 초록색으로 칠해진 부분이다. 싱가포르의 영토는 노랑색 원 안쪽의 작은 부분이다. /사진=위키커먼스
영국 식민지 시절을 거치며 싱가포르는 상업적으로 번성했고 다인종으로 구성된 이민사회를 형성하게 됐다. 이민자 대부분은 중국 출신 화교였는데, 남인도 출신의 인도인이나 영국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아랍인 등도 싱가포르를 찾아왔다. 1819년 1000명에 불과하던 싱가포르 인구는 이민 인구 덕택에 1940년 77만명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게 늘었다.

싱가포르로 이민 온 이들은 크게 무역업자와 노동자 두 부류로 나뉘었다. 싱가포르 개발 초기엔 무역업자들의 상업 이민이 많았다. 영국 동인도회사 직원으로 싱가포르에 상륙한 스탬포드 래플스 경이 무관세 자유항 정책을 쓰면서다. 중국 난양(南洋) 일대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중국인들, 인도네시아 동쪽 셀레베스(Sulawesi)섬의 부기인들(Bugis), 아랍 팔렘방의 부유한 상인 알쥬니에드 등이 무역업으로 번창할 싱가포르의 가능성을 보고 찾아왔다.

1840년대 이후부터는 일감을 찾아 노동자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말레이반도의 농장개발을 위해서는 밀림지대를 개척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선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식민지를 운영하던 영국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민자를 우호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로 맞이했다. 때마침 19세기 초기 중국에서도 청나라 조정이 대규모로 반청 조직을 진압하고 있었다. 진압을 피해 중국인들이 하나 둘 번영하는 싱가포르로 몰려들었다. 이때 하이난에 살던 중국인들 역시 일자리를 찾아 싱가포르로 이주했는데 '웡 이 구안'이라는 하이난 출신 이주 노동자가 하이난 도시 웬창의 전통요리, 웬창 치킨(Wenchang chicken·文昌雞)을 변주해 만든 게 지금 우리가 먹는 싱가포르 치킨라이스의 원형이다.
유튜브 'Wenchang Chicken Dish' 영상 캡처
이후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싱가포르 또한 말레이시아의 한 주로서 독립을 추구하게 됐다. 1955년 4월 싱가포르는 '렌델 개정 헌법'에 의거해 입법의원의 50%를 선거에 의해 뽑았는데, 이를 계기로 정치활동이 더욱 발전하면서 반식민지 독립 투쟁에 나섰다. 중도우파 '인민행동당'(人民行動黨)을 결성, 총리에 오른 리콴유(李光曜)는 1959년 신(新)헌법에 의해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자치령이 되자, 싱가포르 자치령의 수반으로서 말레이시아 연방에 남아 있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당시 싱가포르는 이민 온 이들만 바글대던 작은 섬에 불과했고, 마실 물도 없어 식수까지 말레이시아로부터 끌어와 연명하는 곳이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가 물적·인적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 다른 나라들과 경쟁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봤기에 어떻게든 말레이시아 연방에 남고자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연방에서 내쫓고 싶어했다. 인종 문제 때문이었다. 원주민인 말레이족이 대다수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말레이시아와 달리, 사실상 무인도처럼 방치되고 있던 말레이시아 끝 자락의 섬 싱가포르는 이민자들이 찾아와 대다수 인구 구성을 차지했고 화교가 주류인 지역으로 거듭난 상태였다.

안 그래도 말레이시아 내 말레이족은 이미 화교를 경계하고 있었다. 화교는 중국이란 현실을 떠나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새로 자리를 잡은 만큼 의지와 추진력이 강했으며 성실했다. 자연히 돈벌이에도 능했다. 말레이족은 '이러다간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모든 자리를 화교에게 뺏기겠다'는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됐다. 나아가 화교가 대부분인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의 일부분이 된다면 '말레이시아가 열심히 키워놓은 쿠알라룸푸르에서 싱가포르로 더 많은 재력과 권력이 흘러들어가겠다'는 생각도 갖게 됐다. (말레이시아는 현재까지 이 같은 생각을 기반으로 부미뿌트라(토착 말레이족) 특혜 정책을 펴고 있다. 즉 부미뿌트라가 수적으로는 다수지만 경제적으로는 소수라는 것인데, 이 특혜 정책은 '말레이시아 헌법 153조'에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말레이족은 기업 설립과 취직이 유리하며 차나 집을 저렴하게 구매가능하고 보다 쉽게 공무원이 될 수 있다)으로 명시돼있다.)

결국 1964년 7월,1964년 9월 2차례 말레이 극우 민족주의자들 주도로 인종폭동이 일어나 상호간 수백명 씩의 사상자가 생기자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탈퇴시키기로 결정한다.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독자 생존이 어렵다며 연방 잔류를 다시금 고려해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는 이미 여러 차례 미뤄준 것이라며 이 같은 요청을 거절한다. 1965년 8월 리콴유 총리가 말레이시아 툰쿠 압둘 라만 총리에게 불려가 축출 통보를 받고 우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리콴유는 축출 통보를 받은 뒤 "나는 일생동안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통합을 꿈꿔왔다"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끓어오르는 눈물을 닦는다. 원치않는 독립을 맞이한 신생 독립국 싱가포르는 지도자 리콴유와 함께 혹독한 생존기의 역사를 쓰게 됐다.

이후의 이야기는 알다시피다. 서울의 약 1.2배 크기 영토에 인구는 561만명인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꽉 짜여진 독재통치하에 고속성장을 이어간다. 1980년대부터 한국·홍콩·대만과 함께 '아시아의 4마리 용'(☞ "너무 이기고 싶다"… 한국이 얄미운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대만 그리고 반한감정 ①] 참고)으로 불렸던 싱가포르는 이제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한 인프라부문 경쟁력 2위(2016~2017년) 국가, 1인당 명목 GDP 세계 9위(2018년 IMF 발표) 국가, 국가청렴도 순위 7위(2016년 국제투명성기구 발표)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싱가포르 전경 /사진=visitsingapore 공식 홈페이지
말레이시아는 화교에 대한 걱정이 커서인지 싱가포르가 떠난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대신 질투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말레이시아의 부속 도시에 불과했던 싱가포르가 국제적 명성을 떨치고 있으니 말이다. 림관엥 말레이시아 재무장관은 지난 6월30일 연설에서 "말레이시아는 정신력이 필요하다. 이제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와 경제적으로 경쟁에 나서야 한다. 우리도 싱가포르와의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뿌리가 같은 국가였던 만큼, 공동의 유산이 모두 싱가포르의 것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갖고 있는 것 같다. 림관엥 장관은 같은 자리에서 "싱가포르는 마케팅에 능숙하다"며 "치킨라이스가 싱가포르의 것이냐"고 반문한 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언젠가 '차 콰이 테우'(char kuey teow·중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에서 먹는 볶음 쌀국수로 말레이시아의 국민 음식)도 그들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치킨라이스의 나라, 싱가포르는 어떻게 이처럼 빠른 발전을 할 수 있었을까. 리콴유는 치킨라이스를 먹는 화교, 즉 중국계 아시아인이 대다수로 구성된 싱가포르를 통치하기 위해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선 싱가포르의 발전상을 살펴보고 우리가 배울 점이나 반면교사로 삼을 점 등에 대해 알아본다.

참고문헌
싱가포르 역사 다이제스트100, 가람기획, 강승문
19세기 싱가포르 지역의 화교 조직 연구, 인문학연구, 조원일·김종규
말레이시아 종족간의 갈등 원인과 현황 연구, 사회과학논집, 김종업·최종섭
싱가폴의 인종과 민족문제, 지역연구, 김성건
이민자가 중심이 된 싱가포르 교회, 가톨릭평론, 편집부
싱가포르 화교 회당공사의 사회적 영향력 고찰-19세기를 중심으로, 중국학연구회, 조원일
주류지만 지배하지 않는 싱가포르 화교, 포스코경영연구원 CHINDIA Plus, 왕왕버

☞[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②]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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