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과 박차정, 부부 독립운동가의 불꽃사랑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 2018.08.11 08:30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89 – 김원봉과 박차정 : 독립운동가들의 사랑법


시대의 격변이 낳은 운명적인 사랑! 그것은 드라마가 가장 좋아하는 재료다. 세상을 뜨겁게 밝히다가 사무치게 져버리는 불꽃같은 사랑은 세월이 흘러도 쿵쿵 심장을 울린다. 항일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두려움 없이 타오른 김원봉과 박차정의 사랑 또한 그러하다.

약산(若山) 김원봉!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 산처럼 우뚝 선 그가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영화 ‘밀정’과 ‘암살’에서 의열단장으로 등장하며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에 제 목숨을 불사르며 암살과 파괴로 맞선 젊은이들. 그 의로운 투혼의 중심에 김원봉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자유는 우리의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에게 구걸해 얻어지는 게 아니다.”
1919년 3.1운동은 세계만방에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떨쳤지만, 김원봉은 그것만으론 민족해방을 쟁취할 수 없다고 봤다. 그해 11월 중국 길림성에서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한 이유다. 그는 ‘정의(正義)를 맹렬(猛烈)히 실행하고자’ 동지들을 모았다. 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요인들을 처단케 하여 1920년대 일제와 친일파들에게 공포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여기까지가 오늘날 영화 등을 통해 복원해낸 김원봉의 모습이다. 그런데 독립운동가로서 그이의 진면목은 오히려 이후 행보에 담겨있다. 김원봉은 1930년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우고, 민족혁명당을 건설하고, 조선의용대를 이끌면서 백범 김구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만약 여성운동가 박차정이 곁에 없었다면 이 성장이 가능했을까.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거사에 나갈 때마다 생각하오. 죽음의 무게에 대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총을 든 여주인공은 “왜 사대부 여인답게 꽃으로 살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박차정의 삶이 바로 그 불꽃이었다.

박차정은 열렬한 독립운동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이 경술국치의 울분에 자결했으며 어머니는 김두봉, 김두전 등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한 집안이었다. 오빠들도 신간회와 의열단 활동을 펼친 독립투사들이었다.

그녀도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하면서 여성운동에 앞장섰다. 20살 무렵에는 근우회의 간부로 뽑혔다. 근우회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뉜 여성단체들이 힘을 합쳐 만든 전국 여성운동 조직이었다. 그 행동강령에 따라 박차정은 일체의 여성차별 철폐와 ‘산전 산후 임금 지불’ 등 여성권익 옹호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당시 일제는 여성을 억압하는 제도와 관습을 식민통치에 활용했다. 여성운동이 항일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박차정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를 준비했다. 1930년 1월 그녀는 이 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에 체포당하고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가까스로 풀려나긴 했지만 일제의 감시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 결국 박차정은 의열단원인 둘째오빠 박문호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상해를 거쳐 북경에 이른 이 열혈여성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연인이 의열단장 김원봉이었다. 박차정은 의열투쟁의 전설인 남자를 존경했고, 김원봉 또한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인을 예뻐했다. 동지로 만나 서로에게 스며든 두 사람은 망명지에서 일본 밀정들의 추적을 피해 숨바꼭질 연애를 했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려면 공통의 관심사를 갖는 게 좋다. 독립운동가라고 예외는 아니다. 김원봉과 박차정을 이어준 건 문학이었다. 김원봉은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등 러시아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박차정 또한 여학교 시절 시와 수필을 써서 교지에 싣던 문학소녀였다. 그들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곱씹으면서 함께 조국 광복을 꿈꾸지 않았을까.

1931년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하며 부부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김원봉은 1920년대 중반 중국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해 국민당, 공산당과 함께 북벌에 참여한 경험 및 인맥을 살렸다. 장개석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1932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박차정은 여성부 교관을 맡아 이 인재양성 사업의 또 다른 주축이 되었다.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좌우를 아우르는 혁명인재의 산실이었다. 3년 동안 125명의 청년간부들을 배출해 열악한 독립운동에 희망을 불어넣었다. 일제강점기 저항시인 이육사, 중국인민해방군가 작곡가 정율성 등이 간부학교 출신이었다. 김원봉과 박차정의 제자들은 중국, 만주, 조선 등지에서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고 인적자원을 발굴했다.

젊은 인재들을 얻으니 정치에도 힘이 실렸다. 1935년 독립운동 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정당들이 하나로 뭉쳐 민족혁명당을 건설할 때 김원봉은 주도권을 잡는다. 박차정도 이청천 장군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족혁명당 남경조선부녀회를 만들었다.

“조선부녀를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 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고, 또 우리를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다. 우리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조선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통치의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남경조선부녀회 창립선언문을 보면 박차정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민족해방이 없으면 여성해방도 없다는 입장이다. 민족운동이 곧 사회운동이라며 좌우 통합에 앞장선 김원봉의 노선과 일치한다. 그것은 계급을 민족보다 우선시한 동시대 국제공산당 지침과 결이 달랐다. 이는 두 사람을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보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 독립운동가 부부가 빚어낸 사랑과 혁명의 합주곡은 그러나 머지않아 마침표를 찍는다. 1938년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항일 군사전에 돌입했다. 박차정은 이번에도 부녀복무단장을 맡아 최전선에서 싸웠다. 1939년 중국 곤륜산 전투에서 그녀는 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이 부상은 전장에서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는 바람에 점점 악화되었다.

1941년 김원봉은 조선의용대 주력부대를 태항산의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합류시키고, 자신은 중경으로 옮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다. 휘하의 남은 병력은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한 데는 병상의 아내를 돌보려는 남편의 애틋한 심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복무하며 박차정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박차정은 부상 후유증을 떨치지 못하고 1944년 5월 27일 3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김원봉은 아내의 유골을 들고 애통한 마음으로 귀국했다. 그녀의 육신은 남편의 고향 밀양에 묻혔고, 피 묻은 군복은 친정 동생에게 전달되었다.

1995년 대한민국은 박차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독립운동사에 남긴 위대한 족적에도 불구하고 2018년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가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 정권에서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 고위직을 지낸 탓이다.

김원봉은 1947년 서울에서 일제 고등계형사 출신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온갖 수모를 당한 뒤 풀려났다. 좌익의 수괴로서 파업을 조장했다는 혐의였다. 이 일로 그는 옛 동지를 찾아가서 사흘간 통곡했다고 한다. 내가 이러려고 독립운동 했나, 싶었을 것이다.

이듬해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들어설 것이 확실시되고 좌익인사들에 대한 암살이 횡행하자 남북 통일정부를 주장해온 김원봉은 월북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분단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북한정권 내부의 분파투쟁에 휘말려 1958년 숙청되고 말았으니까.

약산 김원봉! 해방된 조국에 그이가 설 자리는 없었다. 남과 북 어디에도. 세상을 뜨겁게 밝힌 어느 부부 독립운동가의 불꽃사랑도 아직 미완인 채 사무친 과제로 남아 있다.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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